내가 이다은 작가의 작업을 처음 접한 것은 지난해 소네마리라는 작은 공간에서 열린 개인전<이미지 헌팅>에서였다. 2014년부터 이어온 사진과 영상 작업들은 주로 아버지, 가족, 그리고 딸로서의 자신이라는 사적인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와 전통의 배면을 조심스럽게 들추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개인전의 핵심은 전시제목과 동명의 영상작업이었는데, 지하철 몰카를 당한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성적 기호로 소비되는 여성 이미지가 어떻게 남성적·포르노적 구조에서 생산되고 유포되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이미지 헌팅>은 공포 영화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극영화적인 연출로 시작해 몰카의 피해자인 자신이 다시 몰카라는 기법으로 ‘피해자화’되는 과정을 쫓는 다큐멘터리적 촬영으로 이어지다가, 뺏긴 이미지의 순환과 변형 양상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영상이었다. 완전히 자기독백적이지도, 관찰자적이지도 않은 <이미지 헌팅>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피해자로서의 고통 서사에 침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영상의 후반부에는 혜화시위 장면을 담아내는데, 어떤 당사자성과 분노가 아니라 반쯤은 냉소적이고 반쯤은 풍자적인 태도로 이 시대 현실의 폭력적인 재현 구조를 다루고 있었다.
이 시대 ‘여성’에 대해 발언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과 달리, 이다은의 작업에서 먼저 읽히는 것은 그런 아이러니에 가까운 그 무엇이었다. 분노를 헛웃음으로 배출해버리듯, 작가는 현실의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시위를 담아내고, 조작/변형되는 인터넷상 여성사진들의 작동방식을 비판하는 동시에 거리낌없이 자신의 이미지로 가지고 놀기도 한다. 여기에는 아무리 남성들이 나의 이미지를 착취하고 성적대상으로 소비한다고 해도, 그 이미지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견고한 주체적 태도가 엿보이기도 하고,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로서 자신이 속한 착취와 폭력의 현실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는 기록자적 강박이 읽히기도 했다. 편집의 기법이나 구성적 전개가 주목할 만한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주지 않더라도,이 영상 작업은 여성의 경험과 성폭력에 대한 비판에만 초점을 둔 근래의 ‘페미니즘 작업’들에서 가장 현재적인 시점을 파고들며 현장성과 긴급함, 파열점을 내비치는 보기 드문 작업이었다.
지난 2016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가장 뜨겁게 터져 나온 목소리이자, 여러 문화적 관행들과 예술의 지형을 뒤흔든 사건이다. 그 물결의 한 가운데에서 또는 아직 식을 줄 모르는 여파로서 페미니즘을 표방한 문화예술행사, 전시들이 이곳 저곳에서 등장했다.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혹자는 ‘페미니즘’이라는 표제만 달면 문화예술분야 지원금을 받거나 관객몰이에 도움이 된다며 항간에 일어나는 이런 경향들을 시류에 ‘편승’한다고 냉소하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여성작가로서 여성의 재현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언제나 망설임과 위험이 뒤따르게 마련이다(물론 일말의 망설임 없는 작가들도 있겠지만.) 순진한 당사자성의 발로가 아니라면, 언제나 여성인 ‘내’가 이 사회의 구성적 존재로서, 어떤 관계, 위계,그리고 차이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험이란 실재인 동시에 구성적 허구이기도 하다”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그 경험을 재현하고 여성의 현실을 발화하는 행위에는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 그리하여 남김없이 동일시되지 않는 편린들이 남을 것이고, 예민한 작가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행하는 각오 비슷한 것을 감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재현의 책임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재현의 윤리라고도 부를 것이다.
이번에 아이공 미디어극장에서 상영한<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지난 해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한 렉처 퍼포먼스의 편집 영상이다. 퍼포먼스<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페대기’라는 페미니즘이론연구 콜렉티브가 함께 만들었고, 그 목적은 자신들이 함께 공부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지평을 비학술적이면서도 수행적인 방식으로 대중들과 공유하고자 했다.미디어 작가, 연극배우, 퍼포머,미술작가 등으로 구성된 성격을 십분 활용하면서 연극, 음악, 영상, 몸짓, 오브제 등이 결합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제목에서 드러나듯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도래한 페미니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그 안에서 가려진 자들,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워마드를 비롯해 자신들을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들의 트랜스젠더 배제, 난민 혐오에 맞서며 페미니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의 지형을 과감히 드러낸다. 기실, 미술 현장에서는 보기 드문 직접적인 발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은 백인 엘리트 중산층 여성의 페미니즘이 배제시킨 다양한 목소리들을 아우르기 위한 이론적·실천적 운동이다. 퍼포먼스는 이러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지금 여기 한국적 상황에 대입시켜4명의 화자들, 소위 ‘부적절한 타자’들의 목소리를 불러온다. 4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된 퍼포먼스는 트렌스젠더, 장애인-성노동자, 이주민여성, 예멘 난민을 각각 다룬다. 각 스테이지를 설명하고 보완하는 강연자-도슨트가 ‘교차성 페미니즘’이나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용어를 설명해주면서 재현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독백적 대사와 몸짓, 조명과 소도구들,공간의 연출과 영상의 상영이 각 스테이지마다 교호적으로 작동한다.
배우, 퍼포머, 도슨트들로 각각 열연한 이들은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글로리아 안살두아의 말을 다시 패러프레이즈한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다리, 소용돌이가 몰아지는 교차로….촉진자 글로리아, 매개자 글로리아, 심연 사이의 벽에 두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 ‘우리 겨레, 민주화운동에 충성해야 한다.’진보, 학생 운동권이 말합니다. ‘우리 젠더,여성에게 충성해야지.’ 페미니스트들이 말합니다. ‘국민이 우선이야’ 사람들이 내게 말합니다. 퀴어 운동,사회주의 혁명, 생태주의, 동물권 운동에도 내가 충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문학에, 예술가의 세계에서도…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마지막의 외침은 ‘부적절한 타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고 여기는 매개자로서 창작자들의 목소리다.페미니즘을 ‘공부한’ 지적이면서 지극히 자기 의식적인 예술가들의 곤란함이다. 이렇게<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매개자(연구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자신들이 서야 할 올바른 위치를 의식하면서도 그 위치의 허약함과 허구성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재현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를 완벽하게 입을 수 있다는(이해할 수 있다는, 혹은 대변할 수 있다는)확신 자체를 거부한, 예민하고도 영리한 창작자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이질적인 사건,혹은 수행적 실험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이기보다 다소 해설적이고 교양적인 모범생의 리포트 같은 인상을 안겨 준다.하지만, 이는 운동성이 전제된 아마추어리즘이나 메시지의 과잉이 아니라,그 재현적 책임감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들의 예민함 때문 아닐까.
이진실(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