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감염증과 이동제한의 사태가 종결되지 않고 새해에도 계속되리라는 전망을 체념하듯 수용하며 일상적 재난에 겨우 적응할 무렵, 이다은의 온라인 전시 《이동자들》(2020)이 열렸다. 표제작인 장편 영상 <Movers>(2020)를 포함해서 주로 아카이브로 구성된 작업을 살펴보기에 온라인은 효과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보였다. 난민과 난민화되는 삶을 조망하는 작업이 내용적으로 온라인을 통해 그러한 삶의 이동성을 해소하거나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동자들》은 작가가 앞서 2년간 베를린을 방문하여 남긴 기록, 물리적 이동과 만남으로 인해 가능했던 대화와 정동을 우선 회고적으로 포착한다.
“전장에서 포위된 이들에겐 / 집이 될 수 없는 곳도 없고 / 집이 아닌 곳도 없다”
‘Audre Lorde in Berlin’ 시리즈는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와 인연이 있는 베를린의 여성주의 공간을 돌아본다. 베기네(Begine)의 바바라 호이어와 베아테 자이퍼트, 쇼코파브릭(Schokofabrik)의 안케 페터센과 같은 운영자들은 여성주의 운동과 공간 운영의 역사를 들려준다. 여성 자립 생활 공동체로 시작한 베기네에서는 바바라 호이어가 강조하듯 독일 통일 이후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교차적 사고가 전경화 되었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쇼코파브릭의 운영에서도 실질적인 화두였다. ‘여성들만의 공간’은 각종 피해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이슬람 문화권의) 이주 여성의 억압을 고려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의 발견이나, 마찬가지로 종교적 맥락에서 트랜스 여성과의 갈등을 고려하여 공간 입장 시간을 조율해야 했던 일. 이와 같이 ‘물리적 공간’에서의 사람들의 만남은 더욱 절실하고도 구체적으로 교차성 사고를 촉구한다. 이들 공간은 68혁명 이후 활성화된 여성운동과 점거운동을 배경으로 80년대에 등장했다. 부동산 점거나 매입 등을 통한 공동의 물리적 공간의 확보는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표적인 저항 운동이 되었다.
난민과 난민화되는 삶을 다룬 이번 전시에서 이다은은 “‘장소를 점유하지 않고’, 장벽을 최소화한 ‘비물리적 공간’에서 작업에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 전시를 작업의 주요 개념으로 삼는다고 밝힌다. 온라인이 오프라인 전시 실행의 어려움을 대체하기 위한 실용적인 대안에 그치지 않고, 난민화되는 삶에 관한 예술적 표현이나 이미지 사유에 있어 개념적으로 도입되었다면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이동자들》은 온라인 전시의 형식을 오프라인 전시의 형식과 절충하여 사용한다. 3주의 전시 기간이 지나면 프로젝트의 메인 컨텐츠인 영상 작업은 썸네일만 남아 더 이상 감상이 불가능하다. 수많은 온라인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페이지가 도메인 유지기간 동안 우연한 방문객을 상대하다 문을 닫는 제한된 전시 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그러한 일시성을 더욱 강조하듯 전시 기간을 3주로 제한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동자들》의 기간 제한은 오프라인 전시와 마찬가지로 관람객의 집중과 적극성을 촉구하며, 전시기간 중 예고된 주간 업데이트는 지속적인 방문을 유도한다. 주요 작업은 오픈 시점에 대부분 공개하고, 사운드 작업이 조금씩 올라오는 정도라 관객과의 지속적 연결이 얼마나 성취되었고 효과적이었을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작가가 온라인에서의 자유로운 접속의 가능성보다, 보다 폭넓은 접근성을 부여하면서도 제한을 두려는 제스처와 연관하여 ‘이동자들’의 실존적 조건을 살펴보도록 한다.
난민화되는 삶을 사는 ‘이동자들’은 정작 그렇게 명명된 것과 다르게 이동의 무제한한 자유로서의 기동력을 뽐내기보다는 이동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삶의 조건 속에 놓여 있다. 즉, 이들의 이동에는 전적인 자유보다 억압과 차별에서 비롯된 불가피함의 맥락이 숨어 있다. 오드리 로드의 말마따나 (정확하게는 그의 시구대로) “전장에서 포위된 이들에겐 / 집이 될 수 없는 곳도 없고 / 집이 아닌 곳도 없다”¹. 집을 떠난 이는 모든 곳을 집으로 삼는다. 모든 곳이 거저, 아무런 장벽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장에서는 매일 투쟁이 벌어진다. 이렇게 점거를 상상하는 일은 (억압에 의한) 이동을 수동적이고 불가피한 도피에 멈춰 세우지 않고 적극적인 연대와 저항의 모색으로 전환시킨다. 온라인은 난민화되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도 거의 차별 없이 자리를 내어 주지만, 그러한 무중력한 포용력이 특히 물질적 삶에서 내몰린 이들에게 최종적인 대안은 될 수 없어 물리적 공간의 점거는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남는다.
빈곤한 이미지 사유를 옹호하며
《이동자들》이 작업을 통해 여성주의 점거 운동을 선동하려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작가의 개입 없이 객관적인 자료에 가까운 영상이나 텍스트를 통해 베를린의 난민 및 여성들의 삶에 대한 내용을 접할 수 있지만 충분한 정보나 체계적인 연구가 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이렇게 간략한 아카이브에 비해 전시의 표제작인 <Movers>는 장편 영상이기도 하지만 매우 많은 내용이 담겨있으면서도 잉여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파편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업에 담긴 5인의 인터뷰는 이미지 층위에서 제각각이다. 베를린 장벽, 브란덴브루크문, TV 타워, 슈프레 강 등의 풍경이 브이로그처럼 비치는 가운데 인터뷰 내용이 음성도 없이 자막으로 지나가는가 하면, 친밀한 분위기로 한국 출신의 여성 퍼포먼스 예술가의 작업 소개를 자세히 들려주고, 바디 페인팅 퍼포먼스에 사운드를 입혀 퍼포먼스 영상처럼 연출하거나, 인터뷰를 준비하는 장면만 길게 보여주기도 한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바로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난민 파리바와 통역사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다른 인터뷰들이 잘 정리된 텍스트 자막으로 제시되거나, 한국어로 비교적 효과적으로 답변하여 풍부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파리바의 인터뷰는 적어도 영상에서는 내용이 배제되다시피 편집되었다. 촬영자의 목소리가 들어가거나, 파리바와 통역사들이 인터뷰의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답변의 순서를 상의하고, 번역 자막이 제시되지 않는 다리어로 준비한 대본을 현장에서 통역사들이 독일어로 함께 번역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것은 말의 내용보다 긴장하고 머뭇거리거나 생각하는 모습과 같은 상황적인 이미지이다. 결국 준비된 원고는 몇 문장을 낭독하는데 그치고, 파리바의 원고 전문은 사진과 텍스트 파일로 아카이브 섹션에 따로 공개된다. 영상에서 빠진 인터뷰 내용에는 영상에 삽입된 희망적 선언에 가까운 문장에 비해 피난 과정의 공포와 난민으로서의 삶의 고통과 같은 구체적인 경험에 관한 대목이 있다. 재현된 이미지로서의 영상과 기록된 아카이브는 분명 작가에 의해 의식적으로 구분된 것이다. 인물이 과거에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카메라 앞에서 경험하는 상황을 빠짐없이 보도록 하는 것은 얼핏 다이렉트 시네마의 방법을 상기하게 하지만, 파편적이고도 잉여적인 이미지의 나열은 진지한 다큐멘터리보다 간편한 아마추어 영상에 가까워보인다.
작가가 이러한 파편적인 편집, 또는 ‘빈곤한 이미지 사유’를 표현의 방법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토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에서 이미지 계급 사회의 말단에 있는 저화질 이미지의 상황이 이미지의 고급 경제에 대항하듯 “이미지가 주변화되는 조건들, 즉 온라인에서 빈곤한 이미지로 유통되게 만드는 사회적 힘의 성좌를 폭로한다”고 지적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더 이상 진짜에 대한, 진짜 원본에 대한 것이 아니다. (…) 현실에 대한 것이다.”² 슈타이얼의 글이 여전히 고전 영화와 비디오아트와 같은 ‘예술’로서의 영상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달리, 이 글에서 염두에 두는 ‘빈곤한 이미지 사유’의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대중문화이자 새로운 유망 산업으로 부상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의 UCC 영상을 대상으로 한다. 빈곤한 이미지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빈곤한 사유에 관심을 두려는 것이다.
이미지 사유의 빈곤은 곧바로 빈번한 이미지 재현의 윤리적 몰락으로 나타나며 포스트 트루스 시대를 자조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다은은 이러한 시대적 현실을 규범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외려 혼란스러운 이미지 재현과 윤리적 현실이야말로 그의 작업 의욕을 추동한다. 작가노트에서 그는 “실존하는 세계와 사건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가공되어 미디어의 형식을 입고 전시나 어떤 표현의 장으로 넘어오게 되었을 때 그것이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며 자신의 염세적 태도와 멜랑콜리를 고백하고, 그것이야말로 작업의 원동력이라고 밝힌다.
<Movers>의 후반부에서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으로 카메라를 든 인물이 강에서 헤엄치거나 허우적대며 물에 잠기고 흔들리는 시점샷이 등장했을 때, 이미지는 아슬아슬하게 윤리적 위반의 경계에 선다. “저희는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영상에서 생략된 파리바의 대본의 한 구절이다. 생명을 건 피난의 이미지를 두고, 슈프레 강의 물놀이로 마치 그것을 비슷하게 추체험할 수 있다는 듯이 보여준다면 얼마나 폭력적인 재현이 되는가? 그러나 이 영상 작업에서 두렵고 고통스러운 체험은 시각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는다. 다소 노골적으로 삽입된 이어지는 클립에서, 부산에서 출발한 한국인 원정단의 유라시아 시민 대장정은 난민의 이동과 닮기는커녕 난민의 삶이 지워진 단일한 국가의 이미지만을 표상한다.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다은의 빈곤한 이미지 사유는 보이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 삶과 이미지의 ‘현실에 대한 것’이다.
김정현(미술비평가)
(1) Audre Lorde, “School Note,” The Black Unicorn (W.W. Norton and Company, New York, 1978), p. 55. 오드리 로드, 주해연·박미선 옮김, 「남자아이」(1979),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p. 108에서 재인용.
(2) 히토 슈타이얼, 김실비 옮김, 『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 2018, p. 49 & p.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