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 반사, 반투명

미분류 2022년 August 1일

이다은 개인전 《안개, 상자, 입》 비평 – 반영, 반사, 반투명

화면 속에 거울이 하나 놓여있다. 거울이라는 사물은 자신이 원래 하던 대로 그 표면에 반영되는 세계의 이미지를 담아내는데, 그 장면을 카메라로 다시 찍으니 거울 속 세계는 디지털 이미지의 레이어처럼 화면 속의 화면으로 둥둥 떠오른다. 그렇게 하나의 화면에 겹쳐지는 두 개의 이미지. 그때, 화면 속 세계에 바람이 불었는지 순간 거울이 부르르 떨린다. 당연히 거울이 담고 있던 이미지도 덩달아 흔들린다. 단단히 고정된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세계에 놓인 그 사물-이미지의 흔들림에서 화면을 보고 있는 관객들은 순간적으로 이미지와 세계 사이의 괴리를 목격한다. 현실에 놓인 사물과 그 사물이 매개하고 있는 이미지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 이미지가 특정한 방식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것이 감각된다.

이다은의 이번 전시는 위에서 이야기한 〈인덱스, 성좌〉의 초반부 장면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미지와 세계 사이의 거리, 그리고 이미지가 매개되는 방식을 다층적으로 다루어낸다. 작가는 〈이미지 헌팅〉(2018)부터 일찍이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그의 방법론이 무엇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관념적이거나 형식적인 문제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와 연결해왔다는 점에 있다. 이전 작업에서는 카메라의 역사와 여성의 재현, 그중에서도 ‘몰카’라는 구체적 사안을 접붙인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이번에는 라이다(LiDAR)와 이주, 난민의 문제를 엮어낸다. 시각문화와 광학사, 그리고 정치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세계들을 직조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의 작업들도 아주 구체적인 하나의 이미지이자 사건에서 출발한다.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소위 ‘새우꺾기’를 당한 채 구금되고 있는 난민의 이미지. 난민이 구금(detention)되는 장소의 이름이 ‘보호소’라고 붙어있는 것부터 어떤 굴절이 감지된다. 그런 기호의 빗나감은 오히려 어떤 현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은유의 뒤집어진 역능이다. 여기에서 이다은의 전시가 은유의 문제를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아르코대극장의 건축을 배경으로 펼쳐진 퍼포먼스 영상 작업 〈은유의 변주들〉은 그 제목부터 어떤 사건을 다루기 위한 작가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민의 이미지를 은유하는 것이 문제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재현의 윤리적 문제 때문이다. 타자를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복잡한 문제이지만, 특히 예술가에 의한 재현은 타자의 사건을 자신의 예술 작업으로 매개하려는 예술가의 욕망이 필연적으로 묻어날 수밖에 없고, 또한 정치적인 목적을 전면화한다고 해도 재현하는 주체가 대상이자 타자를 과도하게 대표하게 되기에 윤리적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다은의 〈은유의 변주들〉이 흥미로운 점은 재현에서 문제가 되는 힘 관계를 명확히 인식하고서 재현과 은유, 그리고 변주라는 문제를 아예 전면화하여 가로지른다는 지점에 있다.

외국인보호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면밀히 조사한 작가는, 그 사건에서 파생된 몇 가지 장면들을 퍼포먼스로 옮겨낸다. 물론, 재현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서 그 작업의 제목처럼 전혀 다른 몸짓들로 은유와 변주를 반복한다. 이다은과 협업한 안무가, 퍼포머들은 사건에서 파생된 이미지를 몸으로 번역하면서 일종의 난반사를 일으켜 전혀 다른 의미로 튀어나갈 수 있는 다양한 길목을 마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퍼포머들이 입고 있는 반짝이는 코스튬과 인조가죽 소품은 그들의 몸이 난민이 ‘새우꺾기’를 당하고 있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물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아가 코스튬의 반짝이는 재질에 사건에서 파생된 이미지들이 프로젝션될 때에는 이미지들을 말 그대로 (난)반사시키며 또 다른 굴절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재현의 문제를 다루면서 은유나 변주, 나아가 사건을 추상화하는 문제를 다루어낸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섬세하게 접근한다고 해도 특정한 타자의 고통에서 출발한 문제를 작가 정체성을 걸고 작업으로 만들어낸 이상 윤리적인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리는 구체성과 추상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형상을 지우고 흐릿하게 만들거나, 은유와 변주를 사용한다고 해서 윤리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윤리는 항상 이미지를 찢고 나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다은의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문제를 딛고서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나의 작업뿐만 아니라, 여러 작업들이 매개된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작가와 기획자는, 작업들이 성좌를 이루고 있는 전시 자체를 “은유의 아카이브”로 구성해내는 방법을 통해 정치적인 예술의 역설과 재현의 역학에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드러내는 것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 곳곳에는 작업이 만들어진 과정에서 파생된 이야기들과 그 사건을 둘러싼 아카이브가 (반투명의 종이에 프린트 되어서) 함께 놓여있다. 특히, 1층 전시장의 가장 안쪽에는 문제의 그 이미지가 액자에 담겨 걸려있는데, 조명을 적절히 조정하고 액자에도 반투명한 필터를 사용하여 그 이미지는 반쯤 거울처럼 작동한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그 이미지를 자세히 보려고 하면, 보는 사람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지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사진을 찍고 있는 장치가 그 이미지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곳에는 이미지와 실재의 문제뿐만 아니라, 대상과의 윤리적 거리라는 또 하나의 문제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이러한 맥락을 두고 〈인덱스, 성좌〉의 초반부 풍경과 거울의 매끄러운 영상은, 이후 흰 공간에 둥둥 떠 있는 너덜너덜 반쯤 부서진 3D스캐닝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것은 초반부의 영상과 같은 장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미지는 섬세하게 모델링 된 것도, 고급 장비로 스캐닝 된 것도 아니다. 가난하다 못해 죄다 찢어진 이미지. 심지어 작가는 영상 틈틈이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스캐닝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외국인보호소의 로비를 스캔한 이미지에는 거울 속에 아이패드를 들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가 나온다. 전시장 1층 안쪽 방에 있던 사진에 반투명하게 비춰지는 관객의 이미지와 오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거울 속 사람과 광학 장치.

〈인덱스, 성좌〉의 영상은 그런 스캐닝 이미지에서 이제 아예 별자리처럼 보이는 라이다로만 만들어진 이미지로 또 이어진다. 라이다는 수십만 개의 광선을 사방으로 쏘고 반사되는 시간을 측정해 입체적으로 공간을 옮겨내는 장치이다. 영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라이다 이미지에서 반사된 포인트들을 검은 바탕에 흰 점으로 표시하면서 마치 성좌처럼 펼쳐내고, 그 공간을 이리저리 유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라이다 이미지를 별자리로 은유하면서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 그리고 정치적 문제를 교묘하게 뒤섞는 이다은의 전술은,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튀어 오른다.

발터 벤야민이 자주 사용하는 별자리라는 은유는, 시간의 순서대로 흘러가는 역사적 인식과는 다르게 과거와 지금이 변증법적으로 충돌하는 순간 발생하는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다은이 작업의 텍스트에서도 짚어내듯, 아카이브 이미지는 항상 사후적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과거의 이미지는 역사적 순서와 상관없이 그것은 보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여기의 사건으로 다시 구성된다. 그것은 이 전시가 작동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이번 작업에서 2021년의 화성외국인보호소의 이미지와 1970년대 베트남 난민들의 이미지가 연결되는 것에서 발생하는 변증법, 타자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는 변증법, 그리고 이미지와 실재의 변증법이 뒤얽히는 차원을 생각해보자.

그렇게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리저리 반사시키며 이미지 자체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다은의 전략은, 단지 이미지의 매개를 감각하도록 하는 것에서 나아가 실재, 이미지, 타자 사이의 복잡한 거리들을 성찰한다. 그런 변증법적 성좌 속에서 사건을 담은 이미지는 타자를 재현하면서도 그 힘의 관계를 그대로, 그리고 반성적으로 드러낸다. 이미지를 만들어낸 사람을 담아내고, 나아가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의 모습까지 반영하는 반투명한 반사체들로. 예술적 개입이라는 윤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또 그렇기에 미학적인 문제를 건드리면서. 이러한 방법론은 단지 예술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를 정치로 만드는 작업에 가까울 것이다.

권태현(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