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워크라는 방식으로 역사적/정치적 사건에 접근하는 콜렉티브 핑은 문자적인 것의 기록보다는 물리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사건을 감각하고자 한다. 이는 성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되고 이념화되는데, 이 방식 자체가 연대기적인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닌, 시차 없이 사건들의 직관적인 연결/접합을 통해 역사의 형상을 재감각하는 것이 된다. 1975년 부산에서 개소한 이후 현재는 없어진 베트남난민보호소라는 장소와 2021년 새우 꺾기 자세로 M이 격리당했던 화성외국인 보호소라는 장소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인덱스, 성좌〉에서는 이를 각각 1부와 2부로 연결하면서 국내 난민의 역사를 새로운 성좌로 구성한다. 1 난민에 대한 환대의 방식이든 적대의 방식이든 역사는 예외적 형상을 제하고 하나의 이름으로 매끄럽게 봉합된다면, 콜렉티브 핑은 그 예외적 형상을 현재에 기입하며 불화의 파편들과 이름들로 성좌를 구성하려 한다.
장소의 물리적 재현과 성좌의 이념형
1부의 스크리닝이 극장 한 면을 직렬로 정확히 이분할 한 2채널 상영에 장한길 작가의 라이브 연주가 더해지는 것으로 구성된다면, 2부는 목에 피에조 센서를 낀 퍼포머(김현진)의 대독으로 구성된다―여기에 구 부산 월남난민보호소에서 필드 레코딩한 사운드가 문장 중간중간 증폭되며 미세하게 얹힌다. 이후 편의상, 1부의 스크리닝에서 라이다가 그려 나가는 선분들로 구성되는 왼쪽의 검은 화면을 스크리닝 1-1(장한길)로, 현실 이미지들과 그 그래픽적 재현으로 구성되는 오른쪽 컬러 화면을 스크리닝 1-2(이다은)로 지시하고자 한다. 이 둘은 하나의 사운드에 의해 접합되며 연결된다. 곧 분리 불가능한 체험을 구성한다.
성좌를 구성하는 법은 스크리닝 1-2에서 언급되듯 어떤 순서도 정답도 없다. 라이다는 본인의 위치를 하나의 점으로 놓고 좌우를 끊임없이 오가며 가까운 거리에서부터 다른 점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드러난 점들은 다시 자신의 주변으로 연합 관계를 형성한다. 성좌에는 순서도 따라서 그 점들 간의 주어진 위계도 없지만, 라이다는 자신을 그 성좌의 출발점으로 항시 포함시킴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고수하고, 바깥과 자신의 거리를 선분으로 산출한다. 산출은 더욱 늘어나고 성좌는 복잡한 선들의 교차로 확장되어 간다.
여기서 라이다와 가까운 점과의 거리와 먼 점과의 거리, 그리고 더 많은 점 간의 거리는 시차를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그 시간의 차이는 눈으로 분별되지 않는다.). 나아가 그 연결은 동시적으로 이뤄진다. A-B와 A-C, A-D 등의 연결은 순차적이지만, 가령 A-E의 연결 전에 한 번의 번쩍임으로 그 세 개의 연결이 동시에 발생하며 하나의 성좌로 조합된다. 곧 시간에 따른 분배의 원칙에 따라 점과 점의 연결은 거리에 따라 순차적으로 적용되어 나가지만(거리가 멀수록 연결은 뒤늦게 형성된다. 그것은 속도의 차이가 아니라 순서의 차이이다.), 결과적으로 더 가깝고 먼 곳을 횡단하는 시간의 차이, 그리고 그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시간의 차이 역시 없다(또는 일별할 수 없다.). 여기서 점들의 연결은 수많은 시간의 압축됨이 하나의 시간으로 현현됨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하나로 압축되는 것 역시 가능함을 의미한다(‘현재는 끊임없이 갱신된다!’).
주체의 위치에 따른 성좌의 자의성과 그로부터의 무한한 가능성―확장되는 장소2―의 테제는 라이다의 첫 점과 같이 보이지 않는 주체와의 거리를 상정한다(‘나’로부터 성좌가 구성되고 있다.). 한편, 성좌의 점들은 주체의 시선에 의해 언제든지 기각될 수 있고, 다른 연결 구조를 구성할 수 있다. 반면, 라이다의 수행은 ‘포기 없이’ 모든 점을 잇는 식으로 나아가며, 물리적 데이터의 단순 축적을 통해 실재의 장소적 현전으로 도달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 길을 잃지 않는, 선분들의 빠트림 없는 ‘성실한’ 연결을 통해 성좌를 그리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어떤 형태를 재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본 이미지는 이를테면 캐드 프로그램을 이용한 도면적 재현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기서 라이다는 특정 장소를 향한 발신과 수신을 통해 그 앞에 놓인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 불과한 것은 아닌가(‘그것을 성좌로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같은 라이다의 기록 장치가 만드는 표면 이미지는 주체의 행위를 재현하기보다는 주체의 간극을 지시하며 ‘충실한’ 성좌 이미지를 구현한다. 이는 주체에 의해 존재할 수는 없는 이상향으로서의 성좌이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재현되는 건 장소로서, 모든 시간의 지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시간의 누적은 하나의 시간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 결과로서의 표면 일부를 착각한 것에 불과하고, 그러한 시간을 시각적으로 분별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착각이다. 결국, 성좌의 은유와는 별개로 성좌의 물리적 구성은 결국 어떤 공간의 부분 집합에 불과하다. 어떤 제한된 범위 안의 장소는 물리적 표면을 점들로 분쇄한 결과가 되고, 색과 면으로 채워진 매끄러운 이미지를 벗어나며 장소를 부실하고 어둡게 재현한다. 이러한 성좌의 구성은 결과적으로 이미지를 점으로 분쇄해 흐릿한 형체를 감각하는 것과 같다.
토대만이 흐릿하게 기입되는, 생성되는 이미지는 이 장소를 기계적 눈으로 기록한 결과이며, 하나의 조망할 수 있는 이미지는 레이저 펄스의 발사를 통해 발사된 위치의 좌표로부터 반사된 빛을 받아 기록해 나간다는 점에서, 사실 장소를 한 부분씩 더듬어 나가며 만들어진 것과 같다. 이러한 장소의 번역은 곧 주체의 시선이 빠뜨리는 것, 빈 공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시화 역량을 지니며, 주체의 간극을 가시화한다. 이는 즉각적인 우리의 눈의 재현 방식과는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기계의 기입 방식의 결과가 우리가 아는 형상의 이미지에 가까워지기까지의 시간은 점진적이며 순차적이다. 이러한 순서는 곧 ‘나’(=라이다)가 위치한 곳에서부터 확정된다. 이 데이터가 확보돼 결괏값이 확정되기까지 그리고 이후 점들로 구성된 건물 이미지가 입체적인 형태로 회전하기까지 일련의 사운드가 따라붙는다. 선분이 생겨나는 전반적인 과정 자체에 주조음이 깔리며, 선분이 동시적으로 연결되는 때에 사운드가 증폭된다. 전자가 일종의 지루함을 상쇄하는 드라마적인 향연이라면, 후자는 성좌 구성에 대한 물리적인 번역과 직접적인 매개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상징적이라면, 후자는 지표적이다.
역사의 이미지 형상을 역사에 삽입하기
라이다의 구 월남난민보호소라는 장소 측정의 이미지 번역으로서의 스크리닝―1-1―이 왼쪽에 놓인다면, 대등한 크기의 오른쪽의 스크리닝―1-2―은 그 장소에 대한 푸티지와 현재―아파트, 정비소, 빌라 등―의 촬영 이미지, 그리고 포인트 클라우드를 활용한 또 다른 라이다 측정의 이미지, 그리고 라이다에 관한 설명적 문장, 성좌를 언급하는 테제식의 문장 등이 띄엄띄엄 나오는 자막 등으로 구성된다. 1-1은 연대기적인 국내 난민의 역사를 전반적인 장소의 측정과 함께 기입한다. 현재 센텀시티로 분한 장소, 곧 역사에서는 사라져 기록될 수 없는 지층을 라이다로 기록해 나가는 것 외에도 1975년 베트남 공화국 패망 이후 베트남을 탈출한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부산에 설치됐던 베트남 난민 수용소를 만들고 1993년 이들이 돌아간 것과 같은 역사적 기록들을 표기하는 자막이 화면 상단에 주석처럼 기입된다―이는 1-2에 대한 매개가 된다.
1-2에서, 쪼개져 나아간, 아니 매끈하게 이미지를 반영하지 않는, 하나의 이미지로 봉합되지 않는, 분절된 파편적인 이미지, 그리고 1-1과 유사한 그것들의 또 다른 점들로의 변환 이미지가 부상한다. 이러한 이미지, 곧 뼈대만 남은 현재는 복기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부재 증명으로서, 상실감과 공허 자체를 불러일으키거나 역사로 도달할 수 없게 된 불구의 시선에 대한 알레고리쯤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러한 이미지는 현재에 대한 충실한 번역인 척하는 왜상적 이미지이며 우리의 시선을 그러한 균열의 틈에 함몰시킨다.
여기에 따라붙는 1-1에서 연장된 동시적 사운드는 한층 이러한 느낌을 강조 또는 강화하는데, 사운드는 어떤 중단선 없이 계속 피치를 올리고 그 초과된 범위 안에서 유동한다. 따라서 청자는 이 사운드의 끝을 지정할 수 없으며, 사고의 한계, 판단의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그 결과 일종의 숭고함이 발생한다. 무엇보다 이 사운드는 라이다가 계속 점과 점을 잇고 번쩍이며 이를 하나의 성좌로 종합하는 과정을 밟아나가며 자신의 측정 작업을 쉼 없이 수행하는 것처럼, 다초점으로 뻗어 나가며 복잡하게 뇌와 마찰의 면을 확장해 나가는 듯하다. 멜로디나 박자로 측정할 수 없는 동시다발적인 파편(=점)들이 머리를 때리면서 감싼다.
파편적 현재, 열화된 버전의 현재에는 현재의 재현 이미지 자체가 끼어드는데, 그 사이에는 거울이 있다. 거울은 현실을 가리는 만큼 마주한 카메라 바깥의 현실을 좌우 대칭되게 반영한다. 원래라면 찍히지 않는 면, 곧 카메라가 위치한 면을 위치시킨다. 이 이미지를 라이다는 현실로 인지한다. 불순물의 이미지는 라이다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변형된 현재로 봉합된다. 이러한 거울의 비가시적 면의 가시화와 함께, 이다은은 휴대전화의 프레임 안에 필드워크 차원에서 현장을 찍고 있는 자신의 뒷모습을 비추는 장면으로써 보이지 않는 면―여기서는 주체―을 가시화하는 또 다른 전략을 노출한다. 이 장면은 사실상 이다은 작가가 찍고 있는 카메라 뒤의 또 다른 카메라에 의해 담기는 것이라는 점에서, 찍는 이 역시 성좌의 ‘일부’―공간적 의미에서―이자 ‘부분’―시간적 의미에서―이 됨을 의미한다. 라이다는 거울이 반영하는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이다은을 점으로 구성할 것이다. 인류학자는 관찰 환경의 바깥에 있을 수도 그 안에 참여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현재 남아 있는 것들로부터 과거를 모조리 더듬어 가는, 또는 연결해 가는 필드워크의 방식, 곧 실재에 대한 강박적 태도는 물리적 기계 장치로 이양되고, 사운드는 그것과 연동되며, 기계의 의식(儀式)에 취하도록 주문을 건다. 이러한 기록 장치의 효용은 과거를 기록하기보다 현재에 근접해 가는 데 가깝다. 따라서 라이다는 성좌에 대한 강박적이고도 이상적인 알레고리이다. 이는 또한 사운드의 증폭과 함께 그 성좌가 한 번씩 반짝일 때 성좌의 연결이 뇌리로 연결되는 어떤 인지적 충격을 현상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역사를 과거의 이미지, 현재의 상태, 현재 개입하는 주체의 3항으로 분할하는 1-2의 성좌에는 더 큰 시간적 간극이, 존재들 간의 차이가, 완성할 수 없는 주체의 불가능성이 놓인다. 이는 인공적인 성좌 이미지를 비켜나는 한편, 그 성좌에 또 다른 연결/종합을 수여하며 주체를 가로지른다. 1-1의 라이다가 실재에 근접해 간다면, 동시에 실재와 우리의 이미지의 간극을 지시한다면, 1-2의 라이다는 유사 이미지이자 이미지의 내파를 보여준다.
재현의 딜레마 또는 전략
2부에는 김현진 퍼포머가 피에조 센서 장치를 목에 촬영하고 성명서를 읽는다. 화성외국인 보호소에서 새우 꺾기 자세로 격리당했던 M의 말을, 1975년 학원침투간첩단사건에 연루돼 옥살이하며 고문을 받았던 자신의 경험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한 재일동포 2세가 대독한 성명을 장한길이 녹취를 풀고, 이를 김현진이 다시 대독하는 것이다. 장한길의 성명서 녹취는 입장 전 의자에 따로 놓여 있었는데, “(/) 말꼬리 올림”, “(\) 말꼬리 내림”, “(굵음처리) 강세”, “(*) 울림 강조”, “(_) 늘임표(fermata)”, “(,) 쉼표”, “(…) 해독불가/말꼬리 흐림”이 성명서가 시작되기 전, 그 위에 표시되어 있다(이를 보지 않았다면 그것을 기호화하는 것은, 나아가 그것이 기호화되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독불가”와 같이 재일동포의 말이 현장에서 발화되며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떠나 인지 불가능한 부분을 낳기도 한다. 장한길이 재현하고자 한 성명서는 원본 그 자체가 아니라 녹취를 통해 원래의 문자에 접근하고자 애쓴 결과이자 기계 대신 귀라는 매체를 발신 기관으로서 삼아 판독한 것으로, 동시에 문자 정보 이외의 사운드 정보를 최대한 부기하며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김현진이 읽어 나갈 때 특히 “울림 강조”의 부분에서 사운드의 진동이 강조된다. 피에조 센서에 의해 성대의 진동은 전기 신호로 먼저 변환되어 사운드 장치에 먹임되고, 목소리 곧 문장은 뒤따라오며 그 위에서 산란한다. 낭독 자체로 생성된 음악이 다시 음성 사운드를 조절하며, 이 두 개의 사운드 지층은 끊임없이 상호 피드백된다. 문장들은 고통의 경험들에 대한 증언이다. 바닥에 배를 대고 밧줄로 팔이 꺾여 눕힌 채 있었던 고문뿐만 아니라 원래 두통이 있었고 증상이 심해져 요청한 외부 진료가 거절당하며 겪었던 일상의 고통, CCTV로 감시당하면서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막막한 상황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이를 쿠바 관타나모 수용자들에게 자행된 인권 침해에 비유하고, 보호를 요청하며 성명서가 끝난다.
성명서는 재현하기 위한 표기법을 도입하며 재현의 충실도를 높였음에도 제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를 잘 들리도록 캐릭터성을 구성하고 말을 다듬기보다 원래의 말을 글로 번역하고 다시 이를 단지 분절된 구문으로 읽어 나가기 때문이다. 연극적인 재현을 포기하고 성명서는 퍼포머의 대독으로 ‘이행’된다. 대독을 대독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성대의 진동을 기록함은 언어가 되기 전의 물리적 장소에 대한 번역이다. 반면 그 말은 잉여적인 무엇으로 부가된다.
이 두 개가 뒤섞이며 언어는 더욱 혼란한 더미가 된다. 과연 어떤 것이 가장 피해자의 말에 가까운가. 대독의 재현은 부정확함을 동반하는 녹취의 결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번역 과정에서는 정보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러한 재현은 재현의 충실도가 떨어지는 질적인 가치 하락의 결과로 봐야 할까. 그리고 성대의 진동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위치를 은유하는 것일까, 아님 지시하는 것일까. 이를 듣게 하는 것,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또한 기계 장치의 번역에 의한다. 퍼포머의 수행에 의해 우리가 듣지 못함을 되돌려 주는, 동시에 기계의 번역에 의해 우리가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하는 이 같은 중첩된 재현 방식에는, 음악적 공명을 그 양쪽 각각에서 불러일으킴으로써 예술적인 치환의 언어들이 부가된다.
1-2는 난민의 한 언어를 선택했으며 집요하게 듣고자 했고 들려주고자 했다. 번역으로서의 재현과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가시화 전략 사이에서, 이러한 선택과 이행에 따른 특정 신체의 진동과 음성의 결과는 예술적 긴장으로 확장됨으로써 재현의 전략은 양가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음악의 어떤 단편을 듣는 것 같지만, 그것이 성대나 목소리의 불순물이라는 것을 동시에 인지한다. 이는 그 내용적 불편함 대신에 형식적 과잉과 그로 인한 내용의 감축으로 인한 어려움을 준다. 우리가 마주하는 퍼포머가 쥔 ‘읽을 수 있는’ 성명서, 동시에 관객의 손에 쥐어진 성명서는 낭독의 행위에 의해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순전히 바뀌지 않는다.
이념으로서의 성좌
콜렉티브 핑의 〈인덱스, 성좌〉는 역사를 표면으로 재현한다. 점들이 이루는 그물망이나 넝마주이 같은 이미지의 피륙 속에는 분명 성좌의 알레고리가 있다. 이를 감각하게 하는 건 그러한 성좌의 또 다른 사운드의 번역, 그리고 이를 기초로 한 사운드 퍼포먼스, 그리고 자막과 같은 부가적 언어들이다. 실재계를 연장한 음성 언어의 효과와 상징계 언어의 단서 속에 필드워크의 기록은 변주되며 봉인 속에 가시화된다. 곧 역사의 개별 파편들은 어떤 잠재성의 이미지 자체로서, 온전히 풀려나가는 대신 그 자체로 발화한다. 아니 발화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이미지는 전이적인 역사의 추출과 이행이다. 그리고 주체가 구성하는 성좌이다.
1-1이 성좌의 이상향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인덱스의 총합을 나타낸다면, 1-2는 이미지의 파편적 삽입과 주체의 분기를 통해 성좌를 구성한다. 1-1과 1-2는 사실 커다란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을 잇는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성좌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결절점들이다. 이러한 성좌는 주체의 선택과 판단에 의하며, 따라서 자의적이고 직관적이다. 역사를 해체하며 새롭게 역사를 구성하는 관점을 지시한다. 이러한 성좌는 다시 구성될 수 있고, 주체는 다른 얽힘으로 성좌에 진입할 수 있다.
결국, 1-1의 라이다의 수행이 보여주는 건 장소의 재현 이미지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성좌가 가시화되는 광경, 시간적 거리의 도달 불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을 단번에 단축하는 연결,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잇는 또 다른 사건과의 연합을 통한 의미의 발생 같은 성좌에 대한 이념의 제시일 것이다. 그리고 1-2는 성좌의 구체적 이미지 형상을 제시하는 한편, 공백을 지닌 주체를 성좌로 투여하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지시함으로써 비로소 이상향적 성좌로부터 떨어져 나오기에 이른다. 다르게 말하면, 필드워크의 존재론적 위치함은 그 바깥에서 다양한 참조점들을 끌어오는 인식론적 자각으로 종합된다. ‘불완전한’ 성좌는 주체의 위치를 지시하며 또한 성찰한다. 곧 유한한 역사의 한 부분에 자리하는 주체의 의지와 결단을 상정한다. 그것은 결코 확정되거나 명백한 하나의 역사의 이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1부와 2부의 간극은 콜렉티브 핑이 그러한 성좌의 이념을 실천하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는 떨어져 나가며, 또 다른 성좌가 구성될 것이다.
김민관(예술비평)
1 이은기, 「외국인보호소 CCTV에 잡힌 ‘새우꺾기’, 무슨 일 있었나」, 시사IN, 2021년 11월 1일자, 2021년 12월 21일 접속,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891. 후자의 경우에서, M은 난민의 지위를 연장하지 못해 수감되었지만, 그렇기에 난민에 관해서, 전자와 대별되며, 환대가 아닌 적대의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2 사실, 무한한 장소는 있을 수 없다. 라이다의 물질화된 것들이 위치한 영역 안에서, 부딪쳐 올 수 있는 사정거리 역시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성좌는 장소의 한계, 물리적 공간의 한계와 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