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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상자, 입 : 은유의 아카이브

미분류 2022년 August 2일

<안개, 상자, 입, Haze, Chamber, Lips> 전시 서문

“이처럼 제가 다루고자 하는 영역은 이미 과도하게 다루어진 동시에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불건전한 의미에서 매력적이며 다른 의미에서는 혐오스럽고 가려져 있고 억압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처치 곤란한 것을 다루기 위해 어떤 작은 조각, 어떤 구체적인 것, 구체적인 세계에서 온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토니 모리슨

2021년 6월, 구체적인 세계로부터 하나의 이미지가 생성되었다. 그 이미지는 특정한 텍스트와 함께 움직이며 추상적인 말들 속에 갇힌 누군가를 현실로 불러냈다. 감시와 통제라는 이미지 생성 조건을 단번에 드러내는 이미지, 강렬한 이 한 장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여러 감정들이 빠른 속도로 현실의 이미지를 움직였다. 누군가는 이미지를 부정하기 위해 누군가는 이미지를 구출하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미지를 가져갔다. 그렇게 한 장의 이미지는 바깥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이미지의 현실은 그 방 안에 남아 있다. 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심리적 거리두기로 인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이들이 그 안에 남겨져 있다. 동시대의 난민, 이주민, 감염, 접촉과 격리, 감금과 보호, 타자와 질병의 문제는 관료주의적 수사형식을 매개로 복잡하게 교차하거나 맞물린다. 구금의 감각과 매개되어 인식되는 사건과 이미지들이 아카이브 리스트에 매 초마다 추가되고, 한 장의 이미지는 모든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모순 속에 삭제되고 있다. 

전시 <안개, 상자, 입 Haze, Chamber, Lips>은 구체적인 하나의 이미지가 촉발한 사유와 정동을 참조하며 이미 너무 많이 언급되었지만 여전히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그 이미지를 다시 한번 기록하고자 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구체성과 추상성은 실제 사건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혐오와 연대는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는가. 편견과 상상은, 매체 간 이미지의 전이는, 아카이브 내 이미지의 이주는 어떻게 서로를 참조하며 원본을 변형시키고, 오히려 그 변형 속에서 때로는 실재를 더 인식에 가까운 것이 되도록 만드는가. 전시는 오늘날 어떠한 수사의 형식과 은유가 특정 이미지를 볼 만한 이미지로 인지하게 하는지 그 조건들을 참조하며, 반복해서 언급된 ‘그 이미지’의 주변을 모으려 시도한다. 전시의 제목에 기입된 세 개의 단어는 전시를 출발시킨 한 장의 이미지가 잔상으로 남긴 파편적인 형상들을 은유하고 있다. 비가시성, 어둠, 바닥, 사각지대, 침묵, 그림자, 목소리 등. 수많은 은유로 변주될 수 있는 이 세 개의 단어는 ‘그 이미지’의 공간을 형상화하면서, 전시 공간을 구성하고, 다시 현실에서 은유로서 사용되는 이미지 조각들을 하나씩 불러낼 것이다.  

이다은은 이 전시에서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하는 영상 작업과 퍼포먼스 공연, 작업이 되지 못한 주변적 이미지와 작업을 만들기 위한 필드 워크 리서치 이미지들을 마치 하나의 성좌처럼 배열한다. <인덱스, 성좌>는 필드워크 리서치를 통해 얻은 이미지 데이터와 증언을 활용한 퍼포먼스 공연을 영상과 사운드 퍼포먼스로 재배열한 것이다. 1975년 부산에서 개소한 뒤 지금은 없어진 전 베트남난민보호소 라는 장소를 라이더 촬영한 이미지와 화성 외국인보호소에서 고문당한 M의 말을 피에조 센서 장치로 변형시킨 사운드는 무언가를 통해 매개되어야만 전달될 수 있는 변형된 이미지와 목소리의 간극을 형상화한다. 

이어서 퍼포먼스 영상과 사운드로 조합된 <은유의 변주들>은 감염병과 난민의 이동하는 은유적 이미지를 퍼포먼스라는 신체를 활용한 매체로 옮기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는 감금과 격리의 상황에서 강제되는 신체성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정동을 다루려는 의도이며, 언어화되지 못한 목소리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물리적 공간에서의 억압과 고립이 ‘인간’이라는 신체적(내적) 공간으로 전유되는 지점을 포착한 은유로서의 퍼포먼스는 전시장에서 상영되고 다시 전시 기간 동안 퍼포먼스 공연으로 환기된다.

이렇듯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한 작업들은 은유로서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신체를 활용한 매체로 다시 전이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감금과 격리의 상황이 야기하는 감각을 다루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물리적 공간에서 표출되는 억압과 고립이 인간이라는 신체적, 내적 공간으로 다시 들어갈 때 포착되는 은유는 어떻게 다른 것이 되는지 사유하며 작가는 퍼포먼스의 과정적 아카이브로서 연습영상과 회의록, 퍼포먼스 동작 연구 같은 주변적 자료들을 전시에서 가리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구 부산난민보호소 터 지도와 촬영 장면, 화성외국인보호소 내부 라이다 스캐닝 촬영 장면 같은 리서치 로서의 아카이브는 보도이미지, 웹상에서 범람하는 이미지, 데이터로 인지되는 이미지에 대한 접근방식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그것들은 난민이나 감염이라는 사건으로부터 기인하지만 조각나고 혼재되어 실재 사건으로 연동되지 않고 인식하기 쉽지 않은 은유로서의 이미지로 자리한다. 

점점 더 관습적이고 둔화되어 흘러가는 것, 맥락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공유되는 이 이미지의 이동은 현 상황의 접촉 불가능성, 그렇기 때문에 직접 연루되지 않고 안전한 지대에서 매체를 통해 접근하는 이미지 수용자와 실제 사건의 당사자와의 거리, 간극, 그리고 해결되지 못한 채 침수하는 과거의 사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와 결부된다. 이러한 아카이브들은 사후적으로 만들어내는 정동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M에게 쓰는 편지>와 <현장 녹음 : 20211006 화성외국인보호소 면회실 앞>은 실제로 이미지와의 거리를 좁혀보려는 작가의 시도로서 이미지에 말걸고 이미지에 다가가려는 걸음들이 어떻게 단절되거나 분절되는지, 그리고 어떤 감정을 남기는지 드러낸다. 반면 <구속과 초록에 대하여>와 <personal color 연구 A>는 직간접적인 접촉 속에서 남겨진 흔적들이 어떻게 추상화되어가면서 감정만을 남기는지 젤 네일 아트의 재료를 사용하여 그 물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작가는 이러한 정동의 흐름과 강도를 기록하며 휘발되거나 사라지는 개인적 감정만을 보기보다는 그것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연대의 움직임들을 포착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작년부터 이 이미지가 작동시킨 현장의 이미지 텍스트로 이어지며 현장 다큐멘터리 영상과 발언의 사운드들 속에서 다시 이 전시가 어떤 이미지를 구출하고자 했으며 어떤 구체성을 기억하고자 했는지를 환기하는 것이다.

“집 안에 있을 만한 것, 책을 걸 고리가 되어 줄 수 있는 어떤 것, 아주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했습니다. 제게 그 이미지, 그 구체적인 물건은 바로 재갈이었습니다.” -토니 모리슨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토니 모리슨의 글은 이렇게 다음 문장으로 이어진다. 발췌된 부분은 어린 딸이 노예로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딸을 죽인 실제 노예 여성 마가릿 가너의 이야기 <빌러비드>를 설명하기 위해 토니 모리슨이 쓴 부분이다. 노예제 시대에 흑인의 ‘말할 자유’를 막던 재갈을 언급하며 그 폭력적인 사물로부터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었는지를 통찰하는 부분이지만 오늘날 이 문장은 여전히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통제하는 이미지 속 누군가의 가려진 입을 떠올리는데에도 적절한 문장으로 중첩된다. 재갈의 은유가 왜 지금까지 남아서 적절히 다시 쓰일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할 것이다.

전솔비 (미술비평)

콜렉티브 핑, 〈인덱스, 성좌〉: 성좌를 구성하고 판독하는 방법

미분류 2022년 August 1일

필드워크라는 방식으로 역사적/정치적 사건에 접근하는 콜렉티브 핑은 문자적인 것의 기록보다는 물리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사건을 감각하고자 한다. 이는 성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되고 이념화되는데, 이 방식 자체가 연대기적인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닌, 시차 없이 사건들의 직관적인 연결/접합을 통해 역사의 형상을 재감각하는 것이 된다. 1975년 부산에서 개소한 이후 현재는 없어진 베트남난민보호소라는 장소와 2021년 새우 꺾기 자세로 M이 격리당했던 화성외국인 보호소라는 장소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인덱스, 성좌〉에서는 이를 각각 1부와 2부로 연결하면서 국내 난민의 역사를 새로운 성좌로 구성한다. 1 난민에 대한 환대의 방식이든 적대의 방식이든 역사는 예외적 형상을 제하고 하나의 이름으로 매끄럽게 봉합된다면, 콜렉티브 핑은 그 예외적 형상을 현재에 기입하며 불화의 파편들과 이름들로 성좌를 구성하려 한다. 

장소의 물리적 재현과 성좌의 이념형

1부의 스크리닝이 극장 한 면을 직렬로 정확히 이분할 한 2채널 상영에 장한길 작가의 라이브 연주가 더해지는 것으로 구성된다면, 2부는 목에 피에조 센서를 낀 퍼포머(김현진)의 대독으로 구성된다―여기에 구 부산 월남난민보호소에서 필드 레코딩한 사운드가 문장 중간중간 증폭되며 미세하게 얹힌다. 이후 편의상, 1부의 스크리닝에서 라이다가 그려 나가는 선분들로 구성되는 왼쪽의 검은 화면을 스크리닝 1-1(장한길)로, 현실 이미지들과 그 그래픽적 재현으로 구성되는 오른쪽 컬러 화면을 스크리닝 1-2(이다은)로 지시하고자 한다. 이 둘은 하나의 사운드에 의해 접합되며 연결된다. 곧 분리 불가능한 체험을 구성한다. 

성좌를 구성하는 법은 스크리닝 1-2에서 언급되듯 어떤 순서도 정답도 없다. 라이다는 본인의 위치를 하나의 점으로 놓고 좌우를 끊임없이 오가며 가까운 거리에서부터 다른 점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드러난 점들은 다시 자신의 주변으로 연합 관계를 형성한다. 성좌에는 순서도 따라서 그 점들 간의 주어진 위계도 없지만, 라이다는 자신을 그 성좌의 출발점으로 항시 포함시킴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고수하고, 바깥과 자신의 거리를 선분으로 산출한다. 산출은 더욱 늘어나고 성좌는 복잡한 선들의 교차로 확장되어 간다. 

여기서 라이다와 가까운 점과의 거리와 먼 점과의 거리, 그리고 더 많은 점 간의 거리는 시차를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그 시간의 차이는 눈으로 분별되지 않는다.). 나아가 그 연결은 동시적으로 이뤄진다. A-B와 A-C, A-D 등의 연결은 순차적이지만, 가령 A-E의 연결 전에 한 번의 번쩍임으로 그 세 개의 연결이 동시에 발생하며 하나의 성좌로 조합된다. 곧 시간에 따른 분배의 원칙에 따라 점과 점의 연결은 거리에 따라 순차적으로 적용되어 나가지만(거리가 멀수록 연결은 뒤늦게 형성된다. 그것은 속도의 차이가 아니라 순서의 차이이다.), 결과적으로 더 가깝고 먼 곳을 횡단하는 시간의 차이, 그리고 그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시간의 차이 역시 없다(또는 일별할 수 없다.). 여기서 점들의 연결은 수많은 시간의 압축됨이 하나의 시간으로 현현됨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하나로 압축되는 것 역시 가능함을 의미한다(‘현재는 끊임없이 갱신된다!’). 

주체의 위치에 따른 성좌의 자의성과 그로부터의 무한한 가능성―확장되는 장소2―의 테제는 라이다의 첫 점과 같이 보이지 않는 주체와의 거리를 상정한다(‘나’로부터 성좌가 구성되고 있다.). 한편, 성좌의 점들은 주체의 시선에 의해 언제든지 기각될 수 있고, 다른 연결 구조를 구성할 수 있다. 반면, 라이다의 수행은 ‘포기 없이’ 모든 점을 잇는 식으로 나아가며, 물리적 데이터의 단순 축적을 통해 실재의 장소적 현전으로 도달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 길을 잃지 않는, 선분들의 빠트림 없는 ‘성실한’ 연결을 통해 성좌를 그리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어떤 형태를 재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본 이미지는 이를테면 캐드 프로그램을 이용한 도면적 재현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기서 라이다는 특정 장소를 향한 발신과 수신을 통해 그 앞에 놓인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 불과한 것은 아닌가(‘그것을 성좌로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같은 라이다의 기록 장치가 만드는 표면 이미지는 주체의 행위를 재현하기보다는 주체의 간극을 지시하며 ‘충실한’ 성좌 이미지를 구현한다. 이는 주체에 의해 존재할 수는 없는 이상향으로서의 성좌이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재현되는 건 장소로서, 모든 시간의 지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시간의 누적은 하나의 시간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 결과로서의 표면 일부를 착각한 것에 불과하고, 그러한 시간을 시각적으로 분별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착각이다. 결국, 성좌의 은유와는 별개로 성좌의 물리적 구성은 결국 어떤 공간의 부분 집합에 불과하다. 어떤 제한된 범위 안의 장소는 물리적 표면을 점들로 분쇄한 결과가 되고, 색과 면으로 채워진 매끄러운 이미지를 벗어나며 장소를 부실하고 어둡게 재현한다. 이러한 성좌의 구성은 결과적으로 이미지를 점으로 분쇄해 흐릿한 형체를 감각하는 것과 같다. 

토대만이 흐릿하게 기입되는, 생성되는 이미지는 이 장소를 기계적 눈으로 기록한 결과이며, 하나의 조망할 수 있는 이미지는 레이저 펄스의 발사를 통해 발사된 위치의 좌표로부터 반사된 빛을 받아 기록해 나간다는 점에서, 사실 장소를 한 부분씩 더듬어 나가며 만들어진 것과 같다. 이러한 장소의 번역은 곧 주체의 시선이 빠뜨리는 것, 빈 공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시화 역량을 지니며, 주체의 간극을 가시화한다. 이는 즉각적인 우리의 눈의 재현 방식과는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기계의 기입 방식의 결과가 우리가 아는 형상의 이미지에 가까워지기까지의 시간은 점진적이며 순차적이다. 이러한 순서는 곧 ‘나’(=라이다)가 위치한 곳에서부터 확정된다. 이 데이터가 확보돼 결괏값이 확정되기까지 그리고 이후 점들로 구성된 건물 이미지가 입체적인 형태로 회전하기까지 일련의 사운드가 따라붙는다. 선분이 생겨나는 전반적인 과정 자체에 주조음이 깔리며, 선분이 동시적으로 연결되는 때에 사운드가 증폭된다. 전자가 일종의 지루함을 상쇄하는 드라마적인 향연이라면, 후자는 성좌 구성에 대한 물리적인 번역과 직접적인 매개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상징적이라면, 후자는 지표적이다.

역사의 이미지 형상을 역사에 삽입하기

라이다의 구 월남난민보호소라는 장소 측정의 이미지 번역으로서의 스크리닝―1-1―이 왼쪽에 놓인다면, 대등한 크기의 오른쪽의 스크리닝―1-2―은 그 장소에 대한 푸티지와 현재―아파트, 정비소, 빌라 등―의 촬영 이미지, 그리고 포인트 클라우드를 활용한 또 다른 라이다 측정의 이미지, 그리고 라이다에 관한 설명적 문장, 성좌를 언급하는 테제식의 문장 등이 띄엄띄엄 나오는 자막 등으로 구성된다. 1-1은 연대기적인 국내 난민의 역사를 전반적인 장소의 측정과 함께 기입한다. 현재 센텀시티로 분한 장소, 곧 역사에서는 사라져 기록될 수 없는 지층을 라이다로 기록해 나가는 것 외에도 1975년 베트남 공화국 패망 이후 베트남을 탈출한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부산에 설치됐던 베트남 난민 수용소를 만들고 1993년 이들이 돌아간 것과 같은 역사적 기록들을 표기하는 자막이 화면 상단에 주석처럼 기입된다―이는 1-2에 대한 매개가 된다.

1-2에서, 쪼개져 나아간, 아니 매끈하게 이미지를 반영하지 않는, 하나의 이미지로 봉합되지 않는, 분절된 파편적인 이미지, 그리고 1-1과 유사한 그것들의 또 다른 점들로의 변환 이미지가 부상한다. 이러한 이미지, 곧 뼈대만 남은 현재는 복기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부재 증명으로서, 상실감과 공허 자체를 불러일으키거나 역사로 도달할 수 없게 된 불구의 시선에 대한 알레고리쯤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러한 이미지는 현재에 대한 충실한 번역인 척하는 왜상적 이미지이며 우리의 시선을 그러한 균열의 틈에 함몰시킨다.

여기에 따라붙는 1-1에서 연장된 동시적 사운드는 한층 이러한 느낌을 강조 또는 강화하는데, 사운드는 어떤 중단선 없이 계속 피치를 올리고 그 초과된 범위 안에서 유동한다. 따라서 청자는 이 사운드의 끝을 지정할 수 없으며, 사고의 한계, 판단의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그 결과 일종의 숭고함이 발생한다. 무엇보다 이 사운드는 라이다가 계속 점과 점을 잇고 번쩍이며 이를 하나의 성좌로 종합하는 과정을 밟아나가며 자신의 측정 작업을 쉼 없이 수행하는 것처럼, 다초점으로 뻗어 나가며 복잡하게 뇌와 마찰의 면을 확장해 나가는 듯하다. 멜로디나 박자로 측정할 수 없는 동시다발적인 파편(=점)들이 머리를 때리면서 감싼다. 

파편적 현재, 열화된 버전의 현재에는 현재의 재현 이미지 자체가 끼어드는데, 그 사이에는 거울이 있다. 거울은 현실을 가리는 만큼 마주한 카메라 바깥의 현실을 좌우 대칭되게 반영한다. 원래라면 찍히지 않는 면, 곧 카메라가 위치한 면을 위치시킨다. 이 이미지를 라이다는 현실로 인지한다. 불순물의 이미지는 라이다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변형된 현재로 봉합된다. 이러한 거울의 비가시적 면의 가시화와 함께, 이다은은 휴대전화의 프레임 안에 필드워크 차원에서 현장을 찍고 있는 자신의 뒷모습을 비추는 장면으로써 보이지 않는 면―여기서는 주체―을 가시화하는 또 다른 전략을 노출한다. 이 장면은 사실상 이다은 작가가 찍고 있는 카메라 뒤의 또 다른 카메라에 의해 담기는 것이라는 점에서, 찍는 이 역시 성좌의 ‘일부’―공간적 의미에서―이자 ‘부분’―시간적 의미에서―이 됨을 의미한다. 라이다는 거울이 반영하는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이다은을 점으로 구성할 것이다. 인류학자는 관찰 환경의 바깥에 있을 수도 그 안에 참여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현재 남아 있는 것들로부터 과거를 모조리 더듬어 가는, 또는 연결해 가는 필드워크의 방식, 곧 실재에 대한 강박적 태도는 물리적 기계 장치로 이양되고, 사운드는 그것과 연동되며, 기계의 의식(儀式)에 취하도록 주문을 건다. 이러한 기록 장치의 효용은 과거를 기록하기보다 현재에 근접해 가는 데 가깝다. 따라서 라이다는 성좌에 대한 강박적이고도 이상적인 알레고리이다. 이는 또한 사운드의 증폭과 함께 그 성좌가 한 번씩 반짝일 때 성좌의 연결이 뇌리로 연결되는 어떤 인지적 충격을 현상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역사를 과거의 이미지, 현재의 상태, 현재 개입하는 주체의 3항으로 분할하는 1-2의 성좌에는 더 큰 시간적 간극이, 존재들 간의 차이가, 완성할 수 없는 주체의 불가능성이 놓인다. 이는 인공적인 성좌 이미지를 비켜나는 한편, 그 성좌에 또 다른 연결/종합을 수여하며 주체를 가로지른다. 1-1의 라이다가 실재에 근접해 간다면, 동시에 실재와 우리의 이미지의 간극을 지시한다면, 1-2의 라이다는 유사 이미지이자 이미지의 내파를 보여준다. 

재현의 딜레마 또는 전략

2부에는 김현진 퍼포머가 피에조 센서 장치를 목에 촬영하고 성명서를 읽는다. 화성외국인 보호소에서 새우 꺾기 자세로 격리당했던 M의 말을, 1975년 학원침투간첩단사건에 연루돼 옥살이하며 고문을 받았던 자신의 경험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한 재일동포 2세가 대독한 성명을 장한길이 녹취를 풀고, 이를 김현진이 다시 대독하는 것이다. 장한길의 성명서 녹취는 입장 전 의자에 따로 놓여 있었는데, “(/) 말꼬리 올림”, “(\) 말꼬리 내림”, “(굵음처리) 강세”, “(*) 울림 강조”, “(_) 늘임표(fermata)”, “(,) 쉼표”, “(…) 해독불가/말꼬리 흐림”이 성명서가 시작되기 전, 그 위에 표시되어 있다(이를 보지 않았다면 그것을 기호화하는 것은, 나아가 그것이 기호화되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독불가”와 같이 재일동포의 말이 현장에서 발화되며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떠나 인지 불가능한 부분을 낳기도 한다. 장한길이 재현하고자 한 성명서는 원본 그 자체가 아니라 녹취를 통해 원래의 문자에 접근하고자 애쓴 결과이자 기계 대신 귀라는 매체를 발신 기관으로서 삼아 판독한 것으로, 동시에 문자 정보 이외의 사운드 정보를 최대한 부기하며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김현진이 읽어 나갈 때 특히 “울림 강조”의 부분에서 사운드의 진동이 강조된다. 피에조 센서에 의해 성대의 진동은 전기 신호로 먼저 변환되어 사운드 장치에 먹임되고, 목소리 곧 문장은 뒤따라오며 그 위에서 산란한다. 낭독 자체로 생성된 음악이 다시 음성 사운드를 조절하며, 이 두 개의 사운드 지층은 끊임없이 상호 피드백된다. 문장들은 고통의 경험들에 대한 증언이다. 바닥에 배를 대고 밧줄로 팔이 꺾여 눕힌 채 있었던 고문뿐만 아니라 원래 두통이 있었고 증상이 심해져 요청한 외부 진료가 거절당하며 겪었던 일상의 고통, CCTV로 감시당하면서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막막한 상황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이를 쿠바 관타나모 수용자들에게 자행된 인권 침해에 비유하고, 보호를 요청하며 성명서가 끝난다.

성명서는 재현하기 위한 표기법을 도입하며 재현의 충실도를 높였음에도 제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를 잘 들리도록 캐릭터성을 구성하고 말을 다듬기보다 원래의 말을 글로 번역하고 다시 이를 단지 분절된 구문으로 읽어 나가기 때문이다. 연극적인 재현을 포기하고 성명서는 퍼포머의 대독으로 ‘이행’된다. 대독을 대독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성대의 진동을 기록함은 언어가 되기 전의 물리적 장소에 대한 번역이다. 반면 그 말은 잉여적인 무엇으로 부가된다. 

이 두 개가 뒤섞이며 언어는 더욱 혼란한 더미가 된다. 과연 어떤 것이 가장 피해자의 말에 가까운가. 대독의 재현은 부정확함을 동반하는 녹취의 결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번역 과정에서는 정보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러한 재현은 재현의 충실도가 떨어지는 질적인 가치 하락의 결과로 봐야 할까. 그리고 성대의 진동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위치를 은유하는 것일까, 아님 지시하는 것일까. 이를 듣게 하는 것,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또한 기계 장치의 번역에 의한다. 퍼포머의 수행에 의해 우리가 듣지 못함을 되돌려 주는, 동시에 기계의 번역에 의해 우리가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하는 이 같은 중첩된 재현 방식에는, 음악적 공명을 그 양쪽 각각에서 불러일으킴으로써 예술적인 치환의 언어들이 부가된다. 

1-2는 난민의 한 언어를 선택했으며 집요하게 듣고자 했고 들려주고자 했다. 번역으로서의 재현과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가시화 전략 사이에서, 이러한 선택과 이행에 따른 특정 신체의 진동과 음성의 결과는 예술적 긴장으로 확장됨으로써 재현의 전략은 양가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음악의 어떤 단편을 듣는 것 같지만, 그것이 성대나 목소리의 불순물이라는 것을 동시에 인지한다. 이는 그 내용적 불편함 대신에 형식적 과잉과 그로 인한 내용의 감축으로 인한 어려움을 준다. 우리가 마주하는 퍼포머가 쥔 ‘읽을 수 있는’ 성명서, 동시에 관객의 손에 쥐어진 성명서는 낭독의 행위에 의해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순전히 바뀌지 않는다. 

이념으로서의 성좌

콜렉티브 핑의 〈인덱스, 성좌〉는 역사를 표면으로 재현한다. 점들이 이루는 그물망이나 넝마주이 같은 이미지의 피륙 속에는 분명 성좌의 알레고리가 있다. 이를 감각하게 하는 건 그러한 성좌의 또 다른 사운드의 번역, 그리고 이를 기초로 한 사운드 퍼포먼스, 그리고 자막과 같은 부가적 언어들이다. 실재계를 연장한 음성 언어의 효과와 상징계 언어의 단서 속에 필드워크의 기록은 변주되며 봉인 속에 가시화된다. 곧 역사의 개별 파편들은 어떤 잠재성의 이미지 자체로서, 온전히 풀려나가는 대신 그 자체로 발화한다. 아니 발화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이미지는 전이적인 역사의 추출과 이행이다. 그리고 주체가 구성하는 성좌이다. 

1-1이 성좌의 이상향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인덱스의 총합을 나타낸다면, 1-2는 이미지의 파편적 삽입과 주체의 분기를 통해 성좌를 구성한다. 1-1과 1-2는 사실 커다란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을 잇는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성좌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결절점들이다. 이러한 성좌는 주체의 선택과 판단에 의하며, 따라서 자의적이고 직관적이다. 역사를 해체하며 새롭게 역사를 구성하는 관점을 지시한다. 이러한 성좌는 다시 구성될 수 있고, 주체는 다른 얽힘으로 성좌에 진입할 수 있다. 

결국, 1-1의 라이다의 수행이 보여주는 건 장소의 재현 이미지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성좌가 가시화되는 광경, 시간적 거리의 도달 불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을 단번에 단축하는 연결,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잇는 또 다른 사건과의 연합을 통한 의미의 발생 같은 성좌에 대한 이념의 제시일 것이다. 그리고 1-2는 성좌의 구체적 이미지 형상을 제시하는 한편, 공백을 지닌 주체를 성좌로 투여하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지시함으로써 비로소 이상향적 성좌로부터 떨어져 나오기에 이른다. 다르게 말하면, 필드워크의 존재론적 위치함은 그 바깥에서 다양한 참조점들을 끌어오는 인식론적 자각으로 종합된다. ‘불완전한’ 성좌는 주체의 위치를 지시하며 또한 성찰한다. 곧 유한한 역사의 한 부분에 자리하는 주체의 의지와 결단을 상정한다. 그것은 결코 확정되거나 명백한 하나의 역사의 이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1부와 2부의 간극은 콜렉티브 핑이 그러한 성좌의 이념을 실천하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는 떨어져 나가며, 또 다른 성좌가 구성될 것이다.

김민관(예술비평)


 1 이은기, 「외국인보호소 CCTV에 잡힌 ‘새우꺾기’, 무슨 일 있었나」, 시사IN, 2021년 11월 1일자, 2021년 12월 21일 접속,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891. 후자의 경우에서, M은 난민의 지위를 연장하지 못해 수감되었지만, 그렇기에 난민에 관해서, 전자와 대별되며, 환대가 아닌 적대의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2 사실, 무한한 장소는 있을 수 없다. 라이다의 물질화된 것들이 위치한 영역 안에서, 부딪쳐 올 수 있는 사정거리 역시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성좌는 장소의 한계, 물리적 공간의 한계와 접한다. 

반영, 반사, 반투명

미분류 2022년 August 1일

이다은 개인전 《안개, 상자, 입》 비평 – 반영, 반사, 반투명

화면 속에 거울이 하나 놓여있다. 거울이라는 사물은 자신이 원래 하던 대로 그 표면에 반영되는 세계의 이미지를 담아내는데, 그 장면을 카메라로 다시 찍으니 거울 속 세계는 디지털 이미지의 레이어처럼 화면 속의 화면으로 둥둥 떠오른다. 그렇게 하나의 화면에 겹쳐지는 두 개의 이미지. 그때, 화면 속 세계에 바람이 불었는지 순간 거울이 부르르 떨린다. 당연히 거울이 담고 있던 이미지도 덩달아 흔들린다. 단단히 고정된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세계에 놓인 그 사물-이미지의 흔들림에서 화면을 보고 있는 관객들은 순간적으로 이미지와 세계 사이의 괴리를 목격한다. 현실에 놓인 사물과 그 사물이 매개하고 있는 이미지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 이미지가 특정한 방식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것이 감각된다.

이다은의 이번 전시는 위에서 이야기한 〈인덱스, 성좌〉의 초반부 장면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미지와 세계 사이의 거리, 그리고 이미지가 매개되는 방식을 다층적으로 다루어낸다. 작가는 〈이미지 헌팅〉(2018)부터 일찍이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그의 방법론이 무엇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관념적이거나 형식적인 문제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와 연결해왔다는 점에 있다. 이전 작업에서는 카메라의 역사와 여성의 재현, 그중에서도 ‘몰카’라는 구체적 사안을 접붙인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이번에는 라이다(LiDAR)와 이주, 난민의 문제를 엮어낸다. 시각문화와 광학사, 그리고 정치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세계들을 직조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의 작업들도 아주 구체적인 하나의 이미지이자 사건에서 출발한다.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소위 ‘새우꺾기’를 당한 채 구금되고 있는 난민의 이미지. 난민이 구금(detention)되는 장소의 이름이 ‘보호소’라고 붙어있는 것부터 어떤 굴절이 감지된다. 그런 기호의 빗나감은 오히려 어떤 현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은유의 뒤집어진 역능이다. 여기에서 이다은의 전시가 은유의 문제를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아르코대극장의 건축을 배경으로 펼쳐진 퍼포먼스 영상 작업 〈은유의 변주들〉은 그 제목부터 어떤 사건을 다루기 위한 작가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민의 이미지를 은유하는 것이 문제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재현의 윤리적 문제 때문이다. 타자를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복잡한 문제이지만, 특히 예술가에 의한 재현은 타자의 사건을 자신의 예술 작업으로 매개하려는 예술가의 욕망이 필연적으로 묻어날 수밖에 없고, 또한 정치적인 목적을 전면화한다고 해도 재현하는 주체가 대상이자 타자를 과도하게 대표하게 되기에 윤리적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다은의 〈은유의 변주들〉이 흥미로운 점은 재현에서 문제가 되는 힘 관계를 명확히 인식하고서 재현과 은유, 그리고 변주라는 문제를 아예 전면화하여 가로지른다는 지점에 있다.

외국인보호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면밀히 조사한 작가는, 그 사건에서 파생된 몇 가지 장면들을 퍼포먼스로 옮겨낸다. 물론, 재현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서 그 작업의 제목처럼 전혀 다른 몸짓들로 은유와 변주를 반복한다. 이다은과 협업한 안무가, 퍼포머들은 사건에서 파생된 이미지를 몸으로 번역하면서 일종의 난반사를 일으켜 전혀 다른 의미로 튀어나갈 수 있는 다양한 길목을 마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퍼포머들이 입고 있는 반짝이는 코스튬과 인조가죽 소품은 그들의 몸이 난민이 ‘새우꺾기’를 당하고 있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물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아가 코스튬의 반짝이는 재질에 사건에서 파생된 이미지들이 프로젝션될 때에는 이미지들을 말 그대로 (난)반사시키며 또 다른 굴절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재현의 문제를 다루면서 은유나 변주, 나아가 사건을 추상화하는 문제를 다루어낸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섬세하게 접근한다고 해도 특정한 타자의 고통에서 출발한 문제를 작가 정체성을 걸고 작업으로 만들어낸 이상 윤리적인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리는 구체성과 추상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형상을 지우고 흐릿하게 만들거나, 은유와 변주를 사용한다고 해서 윤리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윤리는 항상 이미지를 찢고 나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다은의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문제를 딛고서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나의 작업뿐만 아니라, 여러 작업들이 매개된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작가와 기획자는, 작업들이 성좌를 이루고 있는 전시 자체를 “은유의 아카이브”로 구성해내는 방법을 통해 정치적인 예술의 역설과 재현의 역학에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드러내는 것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 곳곳에는 작업이 만들어진 과정에서 파생된 이야기들과 그 사건을 둘러싼 아카이브가 (반투명의 종이에 프린트 되어서) 함께 놓여있다. 특히, 1층 전시장의 가장 안쪽에는 문제의 그 이미지가 액자에 담겨 걸려있는데, 조명을 적절히 조정하고 액자에도 반투명한 필터를 사용하여 그 이미지는 반쯤 거울처럼 작동한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그 이미지를 자세히 보려고 하면, 보는 사람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지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사진을 찍고 있는 장치가 그 이미지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곳에는 이미지와 실재의 문제뿐만 아니라, 대상과의 윤리적 거리라는 또 하나의 문제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이러한 맥락을 두고 〈인덱스, 성좌〉의 초반부 풍경과 거울의 매끄러운 영상은, 이후 흰 공간에 둥둥 떠 있는 너덜너덜 반쯤 부서진 3D스캐닝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것은 초반부의 영상과 같은 장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미지는 섬세하게 모델링 된 것도, 고급 장비로 스캐닝 된 것도 아니다. 가난하다 못해 죄다 찢어진 이미지. 심지어 작가는 영상 틈틈이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스캐닝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외국인보호소의 로비를 스캔한 이미지에는 거울 속에 아이패드를 들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가 나온다. 전시장 1층 안쪽 방에 있던 사진에 반투명하게 비춰지는 관객의 이미지와 오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거울 속 사람과 광학 장치.

〈인덱스, 성좌〉의 영상은 그런 스캐닝 이미지에서 이제 아예 별자리처럼 보이는 라이다로만 만들어진 이미지로 또 이어진다. 라이다는 수십만 개의 광선을 사방으로 쏘고 반사되는 시간을 측정해 입체적으로 공간을 옮겨내는 장치이다. 영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라이다 이미지에서 반사된 포인트들을 검은 바탕에 흰 점으로 표시하면서 마치 성좌처럼 펼쳐내고, 그 공간을 이리저리 유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라이다 이미지를 별자리로 은유하면서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 그리고 정치적 문제를 교묘하게 뒤섞는 이다은의 전술은,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튀어 오른다.

발터 벤야민이 자주 사용하는 별자리라는 은유는, 시간의 순서대로 흘러가는 역사적 인식과는 다르게 과거와 지금이 변증법적으로 충돌하는 순간 발생하는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다은이 작업의 텍스트에서도 짚어내듯, 아카이브 이미지는 항상 사후적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과거의 이미지는 역사적 순서와 상관없이 그것은 보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여기의 사건으로 다시 구성된다. 그것은 이 전시가 작동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이번 작업에서 2021년의 화성외국인보호소의 이미지와 1970년대 베트남 난민들의 이미지가 연결되는 것에서 발생하는 변증법, 타자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는 변증법, 그리고 이미지와 실재의 변증법이 뒤얽히는 차원을 생각해보자.

그렇게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리저리 반사시키며 이미지 자체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다은의 전략은, 단지 이미지의 매개를 감각하도록 하는 것에서 나아가 실재, 이미지, 타자 사이의 복잡한 거리들을 성찰한다. 그런 변증법적 성좌 속에서 사건을 담은 이미지는 타자를 재현하면서도 그 힘의 관계를 그대로, 그리고 반성적으로 드러낸다. 이미지를 만들어낸 사람을 담아내고, 나아가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의 모습까지 반영하는 반투명한 반사체들로. 예술적 개입이라는 윤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또 그렇기에 미학적인 문제를 건드리면서. 이러한 방법론은 단지 예술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를 정치로 만드는 작업에 가까울 것이다.

권태현(미술비평)

빈곤한 이미지 사유를 옹호하며

미분류 2021년 February 3일

연초부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감염증과 이동제한의 사태가 종결되지 않고 새해에도 계속되리라는 전망을 체념하듯 수용하며 일상적 재난에 겨우 적응할 무렵, 이다은의 온라인 전시 《이동자들》(2020)이 열렸다. 표제작인 장편 영상 <Movers>(2020)를 포함해서 주로 아카이브로 구성된 작업을 살펴보기에 온라인은 효과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보였다. 난민과 난민화되는 삶을 조망하는 작업이 내용적으로 온라인을 통해 그러한 삶의 이동성을 해소하거나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동자들》은 작가가 앞서 2년간 베를린을 방문하여 남긴 기록, 물리적 이동과 만남으로 인해 가능했던 대화와 정동을 우선 회고적으로 포착한다. 

“전장에서 포위된 이들에겐 / 집이 될 수 없는 곳도 없고 / 집이 아닌 곳도 없다”

‘Audre Lorde in Berlin’ 시리즈는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와 인연이 있는 베를린의 여성주의 공간을 돌아본다. 베기네(Begine)의 바바라 호이어와 베아테 자이퍼트, 쇼코파브릭(Schokofabrik)의 안케 페터센과 같은 운영자들은 여성주의 운동과 공간 운영의 역사를 들려준다. 여성 자립 생활 공동체로 시작한 베기네에서는 바바라 호이어가 강조하듯 독일 통일 이후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교차적 사고가 전경화 되었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쇼코파브릭의 운영에서도 실질적인 화두였다. ‘여성들만의 공간’은 각종 피해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이슬람 문화권의) 이주 여성의 억압을 고려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의 발견이나, 마찬가지로 종교적 맥락에서 트랜스 여성과의 갈등을 고려하여 공간 입장 시간을 조율해야 했던 일. 이와 같이 ‘물리적 공간’에서의 사람들의 만남은 더욱 절실하고도 구체적으로 교차성 사고를 촉구한다. 이들 공간은 68혁명 이후 활성화된 여성운동과 점거운동을 배경으로 80년대에 등장했다. 부동산 점거나 매입 등을 통한 공동의 물리적 공간의 확보는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표적인 저항 운동이 되었다. 

난민과 난민화되는 삶을 다룬 이번 전시에서 이다은은 “‘장소를 점유하지 않고’, 장벽을 최소화한 ‘비물리적 공간’에서 작업에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 전시를 작업의 주요 개념으로 삼는다고 밝힌다. 온라인이 오프라인 전시 실행의 어려움을 대체하기 위한 실용적인 대안에 그치지 않고, 난민화되는 삶에 관한 예술적 표현이나 이미지 사유에 있어 개념적으로 도입되었다면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이동자들》은 온라인 전시의 형식을 오프라인 전시의 형식과 절충하여 사용한다. 3주의 전시 기간이 지나면 프로젝트의 메인 컨텐츠인 영상 작업은 썸네일만 남아 더 이상 감상이 불가능하다. 수많은 온라인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페이지가 도메인 유지기간 동안 우연한 방문객을 상대하다 문을 닫는 제한된 전시 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그러한 일시성을 더욱 강조하듯 전시 기간을 3주로 제한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동자들》의 기간 제한은 오프라인 전시와 마찬가지로 관람객의 집중과 적극성을 촉구하며, 전시기간 중 예고된 주간 업데이트는 지속적인 방문을 유도한다. 주요 작업은 오픈 시점에 대부분 공개하고, 사운드 작업이 조금씩 올라오는 정도라 관객과의 지속적 연결이 얼마나 성취되었고 효과적이었을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작가가 온라인에서의 자유로운 접속의 가능성보다, 보다 폭넓은 접근성을 부여하면서도 제한을 두려는 제스처와 연관하여 ‘이동자들’의 실존적 조건을 살펴보도록 한다. 

난민화되는 삶을 사는 ‘이동자들’은 정작 그렇게 명명된 것과 다르게 이동의 무제한한 자유로서의 기동력을 뽐내기보다는 이동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삶의 조건 속에 놓여 있다. 즉, 이들의 이동에는 전적인 자유보다 억압과 차별에서 비롯된 불가피함의 맥락이 숨어 있다. 오드리 로드의 말마따나 (정확하게는 그의 시구대로) “전장에서 포위된 이들에겐 / 집이 될 수 없는 곳도 없고 / 집이 아닌 곳도 없다”¹. 집을 떠난 이는 모든 곳을 집으로 삼는다. 모든 곳이 거저, 아무런 장벽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장에서는 매일 투쟁이 벌어진다. 이렇게 점거를 상상하는 일은 (억압에 의한) 이동을 수동적이고 불가피한 도피에 멈춰 세우지 않고 적극적인 연대와 저항의 모색으로 전환시킨다. 온라인은 난민화되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도 거의 차별 없이 자리를 내어 주지만, 그러한 무중력한 포용력이 특히 물질적 삶에서 내몰린 이들에게 최종적인 대안은 될 수 없어 물리적 공간의 점거는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남는다.    

빈곤한 이미지 사유를 옹호하며

《이동자들》이 작업을 통해 여성주의 점거 운동을 선동하려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작가의 개입 없이 객관적인 자료에 가까운 영상이나 텍스트를 통해 베를린의 난민 및 여성들의 삶에 대한 내용을 접할 수 있지만 충분한 정보나 체계적인 연구가 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이렇게 간략한 아카이브에 비해 전시의 표제작인 <Movers>는 장편 영상이기도 하지만 매우 많은 내용이 담겨있으면서도 잉여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파편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업에 담긴 5인의 인터뷰는 이미지 층위에서 제각각이다. 베를린 장벽, 브란덴브루크문, TV 타워, 슈프레 강 등의 풍경이 브이로그처럼 비치는 가운데 인터뷰 내용이 음성도 없이 자막으로 지나가는가 하면, 친밀한 분위기로 한국 출신의 여성 퍼포먼스 예술가의 작업 소개를 자세히 들려주고, 바디 페인팅 퍼포먼스에 사운드를 입혀 퍼포먼스 영상처럼 연출하거나, 인터뷰를 준비하는 장면만 길게 보여주기도 한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바로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난민 파리바와 통역사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다른 인터뷰들이 잘 정리된 텍스트 자막으로 제시되거나, 한국어로 비교적 효과적으로 답변하여 풍부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파리바의 인터뷰는 적어도 영상에서는 내용이 배제되다시피 편집되었다. 촬영자의 목소리가 들어가거나, 파리바와 통역사들이 인터뷰의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답변의 순서를 상의하고, 번역 자막이 제시되지 않는 다리어로 준비한 대본을 현장에서 통역사들이 독일어로 함께 번역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것은 말의 내용보다 긴장하고 머뭇거리거나 생각하는 모습과 같은 상황적인 이미지이다. 결국 준비된 원고는 몇 문장을 낭독하는데 그치고, 파리바의 원고 전문은 사진과 텍스트 파일로 아카이브 섹션에 따로 공개된다. 영상에서 빠진 인터뷰 내용에는 영상에 삽입된 희망적 선언에 가까운 문장에 비해 피난 과정의 공포와 난민으로서의 삶의 고통과 같은 구체적인 경험에 관한 대목이 있다. 재현된 이미지로서의 영상과 기록된 아카이브는 분명 작가에 의해 의식적으로 구분된 것이다. 인물이 과거에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카메라 앞에서 경험하는 상황을 빠짐없이 보도록 하는 것은 얼핏 다이렉트 시네마의 방법을 상기하게 하지만, 파편적이고도 잉여적인 이미지의 나열은 진지한 다큐멘터리보다 간편한 아마추어 영상에 가까워보인다.

작가가 이러한 파편적인 편집, 또는 ‘빈곤한 이미지 사유’를 표현의 방법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토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에서 이미지 계급 사회의 말단에 있는 저화질 이미지의 상황이 이미지의 고급 경제에 대항하듯 “이미지가 주변화되는 조건들, 즉 온라인에서 빈곤한 이미지로 유통되게 만드는 사회적 힘의 성좌를 폭로한다”고 지적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더 이상 진짜에 대한, 진짜 원본에 대한 것이 아니다. (…) 현실에 대한 것이다.”² 슈타이얼의 글이 여전히 고전 영화와 비디오아트와 같은 ‘예술’로서의 영상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달리, 이 글에서 염두에 두는 ‘빈곤한 이미지 사유’의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대중문화이자 새로운 유망 산업으로 부상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의 UCC 영상을 대상으로 한다. 빈곤한 이미지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빈곤한 사유에 관심을 두려는 것이다. 

이미지 사유의 빈곤은 곧바로 빈번한 이미지 재현의 윤리적 몰락으로 나타나며 포스트 트루스 시대를 자조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다은은 이러한 시대적 현실을 규범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외려 혼란스러운 이미지 재현과 윤리적 현실이야말로 그의 작업 의욕을 추동한다. 작가노트에서 그는 “실존하는 세계와 사건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가공되어 미디어의 형식을 입고 전시나 어떤 표현의 장으로 넘어오게 되었을 때 그것이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며 자신의 염세적 태도와 멜랑콜리를 고백하고, 그것이야말로 작업의 원동력이라고 밝힌다. 

<Movers>의 후반부에서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으로 카메라를 든 인물이 강에서 헤엄치거나 허우적대며 물에 잠기고 흔들리는 시점샷이 등장했을 때, 이미지는 아슬아슬하게 윤리적 위반의 경계에 선다. “저희는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영상에서 생략된 파리바의 대본의 한 구절이다. 생명을 건 피난의 이미지를 두고, 슈프레 강의 물놀이로 마치 그것을 비슷하게 추체험할 수 있다는 듯이 보여준다면 얼마나 폭력적인 재현이 되는가? 그러나 이 영상 작업에서 두렵고 고통스러운 체험은 시각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는다. 다소 노골적으로 삽입된 이어지는 클립에서, 부산에서 출발한 한국인 원정단의 유라시아 시민 대장정은 난민의 이동과 닮기는커녕 난민의 삶이 지워진 단일한 국가의 이미지만을 표상한다.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다은의 빈곤한 이미지 사유는 보이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 삶과 이미지의 ‘현실에 대한 것’이다. 

김정현(미술비평가)

(1) Audre Lorde, “School Note,” The Black Unicorn (W.W. Norton and Company, New York, 1978), p. 55. 오드리 로드, 주해연·박미선 옮김, 「남자아이」(1979),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p. 108에서 재인용.

(2) 히토 슈타이얼, 김실비 옮김, 『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 2018, p. 49 & p. 60.

재현의 무게를 의식하기

미분류 2019년 October 19일

내가 이다은 작가의 작업을 처음 접한 것은 지난해 소네마리라는 작은 공간에서 열린 개인전<이미지 헌팅>에서였다. 2014년부터 이어온 사진과 영상 작업들은 주로 아버지, 가족, 그리고 딸로서의 자신이라는 사적인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와 전통의 배면을 조심스럽게 들추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개인전의 핵심은 전시제목과 동명의 영상작업이었는데, 지하철 몰카를 당한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성적 기호로 소비되는 여성 이미지가 어떻게 남성적·포르노적 구조에서 생산되고 유포되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이미지 헌팅>은 공포 영화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극영화적인 연출로 시작해 몰카의 피해자인 자신이 다시 몰카라는 기법으로 ‘피해자화’되는 과정을 쫓는 다큐멘터리적 촬영으로 이어지다가, 뺏긴 이미지의 순환과 변형 양상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영상이었다. 완전히 자기독백적이지도, 관찰자적이지도 않은 <이미지 헌팅>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피해자로서의 고통 서사에 침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영상의 후반부에는 혜화시위 장면을 담아내는데, 어떤 당사자성과 분노가 아니라 반쯤은 냉소적이고 반쯤은 풍자적인 태도로 이 시대 현실의 폭력적인 재현 구조를 다루고 있었다. 

이 시대 ‘여성’에 대해 발언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과 달리, 이다은의 작업에서 먼저 읽히는 것은 그런 아이러니에 가까운 그 무엇이었다. 분노를 헛웃음으로 배출해버리듯, 작가는 현실의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시위를 담아내고, 조작/변형되는 인터넷상 여성사진들의 작동방식을 비판하는 동시에 거리낌없이 자신의 이미지로 가지고 놀기도 한다. 여기에는 아무리 남성들이 나의 이미지를 착취하고 성적대상으로 소비한다고 해도, 그 이미지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견고한 주체적 태도가 엿보이기도 하고,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로서 자신이 속한 착취와 폭력의 현실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는 기록자적 강박이 읽히기도 했다. 편집의 기법이나 구성적 전개가 주목할 만한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주지 않더라도,이 영상 작업은 여성의 경험과 성폭력에 대한 비판에만 초점을 둔 근래의 ‘페미니즘 작업’들에서 가장 현재적인 시점을 파고들며 현장성과 긴급함, 파열점을 내비치는 보기 드문 작업이었다. 

지난 2016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가장 뜨겁게 터져 나온 목소리이자, 여러 문화적 관행들과 예술의 지형을 뒤흔든 사건이다. 그 물결의 한 가운데에서 또는 아직 식을 줄 모르는 여파로서 페미니즘을 표방한 문화예술행사, 전시들이 이곳 저곳에서 등장했다.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혹자는 ‘페미니즘’이라는 표제만 달면 문화예술분야 지원금을 받거나 관객몰이에 도움이 된다며 항간에 일어나는 이런 경향들을 시류에 ‘편승’한다고 냉소하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여성작가로서 여성의 재현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언제나 망설임과 위험이 뒤따르게 마련이다(물론 일말의 망설임 없는 작가들도 있겠지만.) 순진한 당사자성의 발로가 아니라면, 언제나 여성인 ‘내’가 이 사회의 구성적 존재로서, 어떤 관계, 위계,그리고 차이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험이란 실재인 동시에 구성적 허구이기도 하다”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그 경험을 재현하고 여성의 현실을 발화하는 행위에는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 그리하여 남김없이 동일시되지 않는 편린들이 남을 것이고, 예민한 작가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행하는 각오 비슷한 것을 감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재현의 책임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재현의 윤리라고도 부를 것이다. 

이번에 아이공 미디어극장에서 상영한<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지난 해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한 렉처 퍼포먼스의 편집 영상이다. 퍼포먼스<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페대기’라는 페미니즘이론연구 콜렉티브가 함께 만들었고, 그 목적은 자신들이 함께 공부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지평을 비학술적이면서도 수행적인 방식으로 대중들과 공유하고자 했다.미디어 작가, 연극배우, 퍼포머,미술작가 등으로 구성된 성격을 십분 활용하면서 연극, 음악, 영상, 몸짓, 오브제 등이 결합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제목에서 드러나듯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도래한 페미니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그 안에서 가려진 자들,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워마드를 비롯해 자신들을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들의 트랜스젠더 배제, 난민 혐오에 맞서며 페미니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의 지형을 과감히 드러낸다. 기실, 미술 현장에서는 보기 드문 직접적인 발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은 백인 엘리트 중산층 여성의 페미니즘이 배제시킨 다양한 목소리들을 아우르기 위한 이론적·실천적 운동이다. 퍼포먼스는 이러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지금 여기 한국적 상황에 대입시켜4명의 화자들, 소위 ‘부적절한 타자’들의 목소리를 불러온다. 4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된 퍼포먼스는 트렌스젠더, 장애인-성노동자, 이주민여성, 예멘 난민을 각각 다룬다. 각 스테이지를 설명하고 보완하는 강연자-도슨트가 ‘교차성 페미니즘’이나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용어를 설명해주면서 재현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독백적 대사와 몸짓, 조명과 소도구들,공간의 연출과 영상의 상영이 각 스테이지마다 교호적으로 작동한다. 

배우, 퍼포머, 도슨트들로 각각 열연한 이들은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글로리아 안살두아의 말을 다시 패러프레이즈한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다리, 소용돌이가 몰아지는 교차로….촉진자 글로리아, 매개자 글로리아, 심연 사이의 벽에 두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 ‘우리 겨레, 민주화운동에 충성해야 한다.’진보, 학생 운동권이 말합니다. ‘우리 젠더,여성에게 충성해야지.’ 페미니스트들이 말합니다. ‘국민이 우선이야’ 사람들이 내게 말합니다. 퀴어 운동,사회주의 혁명, 생태주의, 동물권 운동에도 내가 충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문학에, 예술가의 세계에서도…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마지막의 외침은 ‘부적절한 타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고 여기는 매개자로서 창작자들의 목소리다.페미니즘을 ‘공부한’ 지적이면서 지극히 자기 의식적인 예술가들의 곤란함이다. 이렇게<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매개자(연구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자신들이 서야 할 올바른 위치를 의식하면서도 그 위치의 허약함과 허구성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재현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를 완벽하게 입을 수 있다는(이해할 수 있다는, 혹은 대변할 수 있다는)확신 자체를 거부한, 예민하고도 영리한 창작자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이질적인 사건,혹은 수행적 실험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이기보다 다소 해설적이고 교양적인 모범생의 리포트 같은 인상을 안겨 준다.하지만, 이는 운동성이 전제된 아마추어리즘이나 메시지의 과잉이 아니라,그 재현적 책임감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들의 예민함 때문 아닐까. 

이진실(미술평론)

“가자! 부티크 MT로” – 모텔, 모델, 그리고 어떤 모드

미분류 2019년 July 23일

숨이 막히도록 뜨거운 여름 날, 이 도시에서 보다 경제적으로, 땀 흘리지 않고, 쾌적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누군가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고, 시선과 소음, 규제와 간섭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들을 충족할 수 있는 공간은 오직 자기만의 방이거나 모텔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어원이 모터(Motor)와 호텔(Hotel)의 합성어로써 주로 자동차 이용자의 숙박시설이었던 모텔은 이제 성인들을 위한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의 장소”가 되고 있다. 호텔에 비해 저렴한 이용료와 인터넷, 대형TV는 기본이고 노래방 시설, 당구대,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 및 스팀사우나, 월풀욕조, 안마시설, 테마별 룸을 갖추며 ‘우리는 지금 M.T(MoTel)간다’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모텔은 변모중이다. ‘감각적인 디자인’과 ‘세련된 실내 장식’은 젊은 여성층의 다양한 취향에 따라 계속 변화중이니, 도심에서 접근이 용이하고 단시간 이용이 가능하다는 장점과 함께 놀이 시설이 부족한 성인들에게 ‘럭셔리’하고 ‘러블리’한 모텔은 매혹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 특히, 여전히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젊은 층에게 이제 모텔은 먹고, 목욕하고, 섹스하고, 잠자고, 머무는, 거기에 놀이공간까지 결합한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다. 단순히 머물다 스치는 ‘비-장소’가 아니라, 주체의 욕망을 흠뻑 담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모텔은 ‘~여인숙, ~여관, ~장, ~모텔, ~호텔, ~텔’로 변주되며 흔히 음란한 일탈의 장소로 의미화 된 문제적 공간이었다. 그곳은 공적이면서 사적이고, 밤이면서 낮이고, 윤리와 불륜을 동시에 배태한 불온한 장소이다. 일상과 비일상, 합법과 불법이 뒤섞인 ‘부티크’하게 (부)자연스러운 곳. 이러한 모텔을 이다은은 적극적으로 향유하며 신작, <enjoy:motel> 시리즈를 통해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집에서는 하기가 어려운 일들을…어떠한 목적이나 의미도 남기지 않은 채…모텔을 탐방하며……’ 소위, ‘모텔 놀이’를 통해 이다은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재현하는 일은 현대 사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 속의 젊은 여인은 배우처럼 다양한 포즈와 의상, 표정들을 하고 있다. 연극무대의 한 장면을 스틸 컷으로 옮겨 온 듯 잘 구성되고 정제된 이곳에서 주로 슬립웨어나 목욕가운을 입은 채 포즈를 취하는 이 여인은 놀이공간을 향유하는 주체이자 배우(객체)이고,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그녀는 월풀에서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하거나, 요리를 하고, 햄버거를 먹고, 노래를 하고, 당구를 치며 누군가의 시선을 줄곧 신경 쓰고 있는 듯하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인의 시선은 사진 바깥에 놓인 응시와 욕망이 꿈틀거리는 ‘어떤 시선’들과 교차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진적으로 바라보도록 배운다. 자신을 매력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보다 정확히는 사진에 잘 나온다는 판단과도 같은 것”(수잔손탁)처럼, 엿보는 이의 시선에 응답하는 포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진에서 사진 속 여인의 나르시시즘적인 시선과 관객의 시선은 서로를 거울상으로 비추며 서로의 욕망을 투사시키는 장(field)이 된다. 그녀 자신이 욕망하는 모습에 다른 응시가 겹치며 수동적, 무의식적으로 응시를 기다리는 포즈. 모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놀이는 어떠할지, 관객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촬영 된 이 사진 속으로 미끄러진다. 이다은의 <enjoy:motel>을 즐기는(보는) 방법은, ‘누군가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고, 시선과 소음, 규제와 간섭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들을 충족할 수 있는’ 차단된 공간 속에서 ‘놀고 있는’ 이 여인의 행위를 엿보는 것이다. 그녀/작가는 놀이의 목록들을 텍스트로 제시하는데, 쓸모없이 잠시 일어나고, 곧 떠나면 그만인 (작가의 언급처럼) 무용하고 소용없는 일들의 항목이다. 그러나 쓸모없는 소비적 행태로만 읽기엔 이 젊은 여성의 포즈는 참으로 유용하다. 

‘정지’를 뜻하는 포즈(pose/pause)는 사진에서 강력한 코드를 이룬다. 흔히 읽기가 쉬운 사진일수록 코드는 선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작가-여인의 욕망과 사진 찍혀지는 것이 ‘항상 동일한가?’하는 문제를 제시해볼 수 있겠다. 이 지점이 바로 이다은의 사진적 전술이 아닐지, 남성 중심적 상징공간인 모텔에서, 여성의 유희가 어떻게 파악되고 전복될 수 있는가는 이다은의 <enjoy:motel>시리즈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젊은 층 여성 사이에서 선호되는 이미지를 작가는 반복 강화하며 어쩌면 이상화된 쾌적한 여성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의 어색함을 드러내며 사진적인 스타일로서 지배적인 문화적 코드(모텔은 어둡고, 불온하고, 남성의 질서와 시선이 지배하는…)를 해체하고 있다. 모텔 안에서의 전형적 여성성과 그동안 소비 되었던 모텔 씬(scene)의 클리세를 교묘하게 뒤섞으며 엿보기의 균열을 시도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사적인 공간이면서도 사회적인 상징과 의미로 결합된 구성물인 모텔에서의 이다은의 행위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와 어떻게 유희할 수 있는지, 남성-지배적인 시선을 교란시키며 독자적인 욕구와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공간적 실천의 주체가 되어 공간을 생산해내고, 공간과 작가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행위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주체는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행위주체와 공간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다은의 신작, <enjoy:motel>은 성별화 되어 있는 공간의 사회적 관계를 다시 읽어내야 할 과제를 던진다. 공간에 내재해 있는 다층적 권력관계와 더불어 주체와 공간의 관계성, 공간의 사회문화적 맥락과 특히 여성과 공간의 관계를 따지면서 볼 때 보는 재미는 배가 된다. 특히 인테리어의 구성과 행위 주체의 포즈는 개별 주체들에 의해 재구성되는 사회적 모드(mode)를 드러내기도 하기에, 여기-공간은 물리적 장으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재각인되는 실재 장소가 된다. 이제 흔하디흔한 모텔은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곳의 모드는 달라진다. 낮 시간의 금지의 장막과 시선(gaze)을 탈주해 사적인 안락과 희열에 빠지며 이다은이 모텔을 엔조이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능동적인 젊은 여성이 모텔 객실을 다른 컨셉으로 바꾸게 하고, 다양한 공간적 실천의 가능성들을 보여주며 모텔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픽션보다 더 허구적인 일상에서 ‘나’를 즐기는 무해하고 평화로운, 이다은의 <enjoy:motel>은 일상의 경계를 해체하며 사진은 여전히 꿈이고, 환상이고, 연극이고, 또한 사실임을 보여준다.  

최연하 독립큐레이터

Image의 Voyage

미분류 2019년 July 23일

이다은 작가는 동시대에서 자신이 행하는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실천적 행위를 통해 영상, 사진 등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 《Image Hunting》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여성’이라는 주제의식을 관통하면서, 작가가 작품으로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수행의 주체가 되고,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방식을 탐구한다는 데에 일맥상통하다. 작가가 선택한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의 방법론은 영상과 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미술적 언어로 발현된다.

포착, 획득, 가공, 내보내기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객체에게 절대적이며, 객체가 받아들이는 개인적 감상이나 의미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미지는 대상을 심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지는 포착되는 과정에서 이미 주관성을 획득한다. 예를 들어 사진을 찍을 때 사진을 찍는 사람이 프레임을 선택하여 촬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미지가 물리적으로 가공되든 보는 사람에 의한 감상으로 가공되든 이미지 자체로 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다은 작가는 몰래 포착된 –작가는 이를 ‘나는 이미지를 빼앗겼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현실과 환상을 교차하며 이미지를 대상화한다.

<Image Hunting>은 작가가 경험한 몰카사건을 신고하고, 방송출연을 하면서 마주하는 불편한 인식과 묘한 강요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표현하다가,작가가 사냥꾼이 되어 이미지를 재편집 하기도 하고, 중국 공안성의 몰카 예방 캠페인을 조롱하듯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에  덧대어 팟캐스트 영상을 차용하고, 컴퓨터툴을 사용해 직접 이미지를 가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미지가 가공되는 과정을 희화화하며, 제도 안에서 너무 쉽게 배제되어 버리는 피해자의 권리를 녹취와 몰카의 형식으로 표현한다.형식적인 측면에서 작가는 포획 당한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쫓는 과정에서 채집한 이미지들을 재구성 하는 데에 미디어에 경계를 두지 않고, 다층적 레이어를 늘어놓음으로써 작가의 개인적 서사가 담긴 영상과 텍스트로 감정의 전복을 유도한다.이다은 작가는 형식적 변이와 다양한 매체 활용을 통해 자신이 적극적으로 사건 속으로 들어가 사건을 재현하고 왜곡하여 역설적‘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작품 후반부에는 최근 대학로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집회 장면이 등장한다. 이 집회는 인터넷 채널로의‘내보내기’로 해외 SNS와 동영상 채널에서도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몰래카메라가‘molka’로 표기된 바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의 불법 촬영 문제가 단순히 몰래 찍은/찍힌 영상 정도로만 설명되기엔 어려워서 일 것이다. ‘몰카’가 도처에 도사리는 일상적 위험이 되어버린 지금, 이 뒤틀리고 구질구질한 욕망이 어떻게 팽배해버렸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발트라우트 포슈는 『몸 숭배와 광기』에서 인간이 자신의 몸을 객관화, 수량화, 수치화하려는 시도에서 거울, 체중계 등이 등장했고 이를 통해 몸의 성 상품화가 가능했다고 말한다. 여기에 자본주의와 미디어의 발달이 맞물려 정형화된 미적 기준이 형성되고 여성의 몸은 상업적 대상이 되었으며, 미디어의 다각화로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상품화 되었다. 미디어에도 구조적 위계질서가 반영되어 남성은 권력과 소비의 주체가 되고, 여성의 몸은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미디어는 이 관념들을 재생하기를 거듭하였다.

<Image Hunting>속에서 작가가 포획 당한 이미지와 작가가 포획한 이미지들은 이미지 포착, 획득, 가공, 내보내기(유포, 혹은 유포실패를 희망한다.)의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미지는 현실이고, 욕망의 주체에게는 환상이다. 몰카범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든 그것이 매체를 통해 유포되든 기어코 그것은 소비되고 만다.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서 세상으로 나간 이미지를 보고 있자니 ‘내보내기’의 과정도,사라진 이미지를 쫓는 것도 아닌 그저 부유하는 이미지만 있을 뿐이라 허무함 마저 들었다. 애초에 작가는 이미지를 소유하려는 욕망도, 가공할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작가는 그저 사건의 피해자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포획자, 가공자가 되기를 시도함으로써 시선을 전복시키고 욕망을 비틀어버린다. 

여성주의의 지리학

<Deserted House>는 장소와 젠더규범의 관계성을 함의하는 작업이다. 린다 맥도웰은 목소리를 내는 방식에는 어디에서 말하는가가 중요하며,자리가 정해진 사람들은 자리의 이동이 그 자체로 사회의 규범에 저항하는 방식이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제의 권력은 장소와 밀접하다. 특정장소, 사회, 그리고 거대서사 안에서 권력과 타자가 결정되고 나름의 젠더규범이 형성되기 때문이다.할머니는 평생 경주 이씨 가문 종가라는 공간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할아버지 없이, 종가의 며느리로써 제사를 지내고, 자식을 키운다. 그 집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에 대한 균열이 시작된 최초의 곳이기도 하다. 경주 이씨 가문의 타자이자 이방인인 할머니는 며느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그 역할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배우자에게, 배우자의 딸에게로 전이된다. 작가는 마치 복원하듯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제사음식을 하는 과정을 재현하고, 재현의 결과물을 먹은 뒤 토해낸다. 구토하는 행위의 메타포는 매우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토하는 행위 자체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사유하는 태도 같기도 하고, 토사물을 가부장제 안에서 억눌려버린 여성의 울분 같기도 하다. 어쩌면 행위 자체가 ‘저항’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현대 여성주의 이론에서 만들어낸 개념 가운데 가부장제야말로 가장 남용되고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이론화되지 않은 개념이라는 낸시 홈스트롬의 말처럼, <Deserted House>와 <무덤과 비석의 위상학적 지도>다가갈 때에도 가부장제를 결부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때 자꾸 시선의 균열이 생겨난다. 가부장제를 남성지배의 형식이나 사례에 사용하느냐 혹은 사회주의적 측면에서 자본주의 내 계급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접근 방식은 상이해지며, 이때 시각의 균열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가부장제는 세분화된 젠더 이슈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Deserted House>를 통해서 우리는 가정, 집이라는 장소가 갖는 억압성, 통제성, 그 속에 모성화 된 여성의 전형에 대해 좀 더 세분화된 시각으로 가부장제도 속 여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몇 년 전, 명절 스트레스에 관한 설문 조사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세대별, 연령별, 성별마다 이유는 다양했다. 기혼여성들의 경우 제사음식을 차려야 하는 노동에 대한 스트레스가 물론1위를 차지했다. 기혼 남성들의 경우 할 일이 없어서,그 때문에 장인어른과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해서, 본가이든 처가이든 명절 후 부부싸움을 해서 등이 이유였다. 요즘이야 많이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직장과 일,관습 속 젠더 역할 분리가 여전히 선명한 것은 사실이다. 현상학적 측면에서,자연스럽게 체득된 생활의 내외면적 현상들을 통해 작가의 작업을 바라본다면, 작가가 젠더 의식을 작업으로 불러들이는 방식은 가변적이고 수행적이다. 다층적 매체를 활용하여 변이하는 이미지들은 가변적이며, 자신이 작품의 한 가운데로 적극 개입하는 면에서 수행적이다. 또한 현상학에서 다수가 모인 시공간은 객관적 세계로 받아들여 진다. 다수가 모인 곳은 공간성을 띠고,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에는 관념, 규범, 규칙들과 같은 레짐(regime)이 생겨나므로 이 지점에서 지리학적으로 여성주의에 접근하는 앞선 이론과 상응하는 부분이 있다.

개인의 서사는 결코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예술 행위 또한 사회구조적 서사와 개인의 서사, 이 양가가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이는 이다은 작가가 자신의 고민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예술을 택했다는 데서 맥락을 함께 한다. 또한 단순히 성, Sex로 설명되지 않는 구조적 성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젠더라는 용어가 생겨났고,개인은 일정한 장소 마다 역할을 획득하며/당하며, 개인의 생애에서 발생하는 서사는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실하게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멀리보기를 실행해야 하며, 이때 발생하는 시선들이 예술을 통해 작업으로 실현되기도 한다.그러나 여전히 가족이 중심 단위인 사회에 살고 있고, 호주제는 폐지되었지만 뿌리깊은家의식은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가정은 개인과 제도 사이의 교집합이다. 중첩된 이 사회적 단위 안에서 파생되는 계급,권력, 성별 역할 고착화 등의 문제들을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이제서야 고분(孤憤)한다.

무덤과 비석의 ‘지정학적’ 지도 

<무덤과 비석의 위상학적 지도>는 젠더와 관습, 그리고 위계에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부장제도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타자였다. 타자이나 필요한, 필요하지만 주체가 될 수 없는 타자로, 이는 한편으로<Deserted House>에서 할머니가 제사를 지내시던 모습을 상상으로 연상케 한다. 그러나 종가의 위계 앞에서는 그들의 어머니, 종가의 이방인인 큰 할머니는 위계의 상징이 된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자리에 먼저 돌아가신 큰 어머니가 묻히지 못하고 늦게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가 묻혀서 자식들은 억울하다.묘자리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아서 이장을 주장하는 것일까, 돌아가신 어머니의 위상을 회복 시켜드리지 위함일까. 이 욕망을 엿본 작가는 종가의 비석에 여자인 자신의 이름을 올려준다는 아버지에 말에 자신의 욕망에 대해 고민한다. 종가의 비석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것인가 또는 이름을 지움으로써 부조리한 가문의 관습으로부터 스스로 해방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양가 감정에 직면한 것이다. 이로부터<무덤과 비석의 위상학적 지도>는 시작된다. 

가문의 비석을 수정하고 이를 탁본하는 행위는 유교사회의 규율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며, 이씨 가문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사실 어느 일가의 공적비는 가문의 명망이나 이름을 위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지곤 한다. 여기서도 위계가 존재하는 것이다.영상 속 이씨 가문 후손(작가)은 공적비의 이름의 음각을 점토로 완전히 뒤덮지 않고 적당히 매운 뒤 탁본한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이름들은 탁본에 흐릿하게 남아 선명한 활자와 대조된다. 마치 잔재처럼 말이다.

젠더, 가정, 국가, 사회, 직장, 혈연 등 객체로써 개인을 정체화할 수 있는 여러 요소에 대해 작가는 부정하거나 결론 짓거나 선포하지 않는다. 그저 적극적 수행자가 되어 고민을 계속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전의 예술이 사회문제를 표상하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동시대의 예술은 사회문제를 실천적 기재로 변환하는 행동주의적 특질을 띤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다은 작가의 작업 또한 이 흐름을 같이 한다. ‘매체는 예술가 개인의 기억을 복구하여 드러내는 일종의 역사성을 지닌다’는 로잘린드 크라우드의 말처럼,작가의 사적 경험에서 출발한 세 작품은 작가의 기억과 당시 체득한 감정을 복구하고, 작품은 작가 개인의 역사를 상징하는 매개체가 된다. 

며칠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의 운전이 합법화되었다.사우디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운전’이 금지되었던 나라이다. 며칠 새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여성운전’이라는 단어에서 스며 나오는 이 묘한 불편함을 어찌해야 할까. 그 와중에 거대 자동차 회사들은 앞다투어 여성을 타깃으로 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그렇기에 이다은 작가의 작업을 보며 필자는 필연적인 연대의식을 느꼈다. 여성, 아버지의 가부장적 의식, 제사, 제사음식을 할 때 눈치를 보며 아버지와 방에서 쉬던 남동생, 결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필자의 개인적 서사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작업들이 거듭하는 수행과 전복의 변증법을 통해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깊이 들여다보기, 함께 들여다보기이다. 작가는 외부와 제도로부터 자신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 하에 끊임없이 미술 장치의 활용, 형식적 전회를 통해 자신의 사적 영역에서의 작가로의 정체성에 대한 담론, 그리고 여성주의 담론을 정립하고 다져가는 중인 듯 하다. 자기세계 안에서 ‘자신의 말들의 말을 포괄하는 담론’을 확고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 인가. 더군다나 요즘처럼 젠더 갈등이 심화되고 페미니즘 이론 서브컬쳐의 영역까지 고르게 진입한 한국 사회의 지금에서 말이다.

글. 김가영 (아이공 큐레이터)

Whose Gaze 누가 바라보는가

미분류 2019년 July 23일

Whose Gaze

            Michel Foucault claimed that the structure of panopticon, designed by Jeremy Benthan in the eighteenth century, revealed the relationship between power and gaze. The core of panopticon, whosecircular structure was designed to enable the warden to have 360 degree visibility on every prisoner, lies in the inequality of this gaze, where the warden could see the prisoners and the prisoners can’t. The fear of being surveilled 24/7 and the lack of visibility led prisoners to internalize the logic of subjugation. The modern subject, according to Foucault, was someone who internalized the logic of surveillance and became an autonomous being who abides by the rules on their own, which served as a founding element of governmentality in the modern society. This critique still holds to this date, as all forms of gaze presuppose the seer and the seen, creating an unequal power relationship. 

            Through her personal experience, Lee Da Eun has been trying to expose the uneven power structure created from the inequality of gaze, and to rupture this relationship. Her previous series of photography work, which deals with motels, exemplify this approach. In the context of South Korean society, motels are not neutral space for accommodation but a symbolic place for discreet sex in male-centered imagination. The artist reconstructs and reinterprets this space dominated by the male gaze from the femaleperspective. In Enjoy: MOTEL (2014), the artist herself takes on the role of photographic subject, conducting various activities ranging from reading and meditation to cooking at many different motels in Seoul. On the other hand, the photographic subject in M—Father and Motel (2015) is the artist’s father, whostayed at motels on his business trips to other provinces. Aside from the set of contrasts between young woman and middle-aged man, Seoul and other provinces, recreational activities and lodging, etc., the most noticeable difference between the two works lies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bserver and the observed. In the latter work the artist creates a critical distance from her own father and portrays him as a middle-aged man. Meanwhile, in the former the artist, being the viewer of her own gaze, performs an “autonomous” role of the photographic subject as shedeviates from the widely-consumed, stereotypical image of young woman in a motel room.

            In this exhibition, Lee’s medium extends from photography to video in her attempt to critically examine the fixed subject-object relation in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image, intervene in the unequal social structure and create ruptures. Image Hunting (2018) takes on the issue of spycam crimes against young women, which has become subject to the most heated public debate in South Korea in the recent years. Based on the personal experience of having been a spycam victim in the subway, Lee created a thirty-minute-long video that combines various footages that traverses the real and virtual, ranging from the staged scenes in which a female character becomes exposed to the danger of image poaching; documentary footage of the artist’s attempt to investigate her own case until the police dropped it; captured footage of photoshop process in which images of woman become modified and dispersed throughout web; and the footage taken from the anti-spycam protest near Hyehwa station. Overall, all these footages have different contexts and forms, and Lee’s editing is far from seamless. This resulted in the video work that exemplifies how much transformation and distortion the image undergoes from its production to consumption. 

            Althoughthe distortion and transformation of images started with the birth of photography that took painting as its ideal, the photography, the imitation by the machine, guaranteed reality, unlike painting. Today, however, the mechanical properties of photography led by digital technology take the distortions of reality as the default for images. Whereas the old photographer has intervened in the image only in terms ofminimal “choice”—such as what to represent and how to frame it—the image producer intervenes from beginning to end. Nevertheless, the belief in the correspondence between photographic images and what they represent still conceals reality. In particular, images that are widely circulated in public conceal the contradictory and unequal structure of society. Images that are frequently exposed to the media are taken to be normative, beyond being merelyfamiliar, and naturally form stereotypes. Before people could develop a critical eye, the imagesof woman are already being consumed according to the standard of beauty that has been made uniform and the distorted gaze of the male, and the resulting conventions are reflected in everyday life. The situation is even worse for the spycam issue. The spycam, which is often referred to as an exemplary panoptic phenomenonof the contemporary world, presupposes inequality of visibility, where the photographed (or filmed) can’t see the photographer (or the film taker). Furthermore, the images produced by illegal spycams targeting women in public places such as subways, toilets, and dressing rooms, are distributed on the Internet indiscriminately through a certain process and become transferred to capital. The consumption of such images of women is driven by men’s belief in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se images and their objects. Despite the images being subject to through numerous transformations and editing processes before their distribution, they are mistaken for a reality due to the voyeuristic gaze of the lens. As a result, many people accept the distorted image of woman without much criticism, and the resulting stereotypes further consolidate the twisted male-centered culture of this society.

            The other two video works in this exhibition are the artist’s re-interpretation of the paradox of patriarchal South Korean society through her personal narrative. Whereas Lee resists the prejudice against young women and objectifies her own father as a plain middle-aged man, she makes concrete the paradox of patriarchy,which takes place at her grandparents’ house and clan gravesite in Deserted House_Ceremonial Foods(2017) and Deserted House_The Topological Map of the Gravesand Gravestones (2018). Patriarchy implicitly recognizes man as the only wholesome subject. Being born as a woman within this structure implies various forms of exclusion and discrimination: being the firstborn girl isn’t entitled to what the firstborn boy would be, excluded from the family events, and excluded from the clan once married, which would assign her to the role of caretaker and supporter for the new family. Despite being the firstborn in the family descended from Pyongrigong, a division of the Gyeongju Lee clan, the artist sentimentally identifies with other women in the family, who have different surnames that mark them as potential outsiders to the family. In somewhat mediator-like position, Lee visits Jeongeuop, North Jeolla Province, one of the cities where the members of Pyongrigong division gathers for holidays. To twist the core logic of patriarchy and break down stereotypes, she plays the role of an outsider, wearing her grandmother’s hanbok at her grandparents’ house, which has become a run-down hut. In Ceremonial Foods, she carefully prepares food for jesa, eats them, and then throws up on the floor. InTopological Map of the Graves, Lee visits her ancestors’ gravesite in veil, offering flowers only to the female members of her clan and making their gravestone rubbings, which then she uses to create a new memorial filled with their achievements.

            UnlikeImage Hunting, the Deserted House series adopts a form similar to that of narrative film. Just like Enjoy: MOTEL, the artist herself is the filmic subject in these, where she acts out the roles of her own grandmother and an anonymous woman in the Confucian society. However, they are not completely fictional, as they are, along with the various props and the locations in the videos, based on the artist’s actual life. The overall narrative is provided in the subtitle, which tells the story of how her grandfather left home to play his drum across the country, leaving the artist’s grandmother to take care of the household. After she died, he came back home with another woman, and was buried under a better grave than that of the elder of the family—who was a woman—simply by virtue of carrying the surname of Gyeongju Lee clan. All this is narrated in a matter-of-fact tone. In fact, this very personal narrative about the artist’s own grandparents never strikes us as peculiar in the patriarchal society founded on Confucian culture. Although the patriarchal family register system known as hojuje haslong been abolished, this society still maintains patrilineality, exploiting women’s labor to commemorate only male ancestors at jesa. The artist memorializes these numerous, nameless women, and comforts other numerous women who still live in a similar way.

            Every image carries the gaze of viewer. The question, “whose gaze?” is more important than one usually thinks. Two superficially same images may carry opposite intentions depending on who the viewer is. Lee Da Eun gazes at woman as woman. She recognizes her own identity and problematizes the gender bias and discrimination in the South Korean society. Her approach to media is always based on reflections on the subject and object of gaze. The artist herself sometimes volunteers to be the image object, refuting people’s common belief in the strict correspondence between the representation and the represented. Editing herself into the pornographic image acquired from the web is a great example of such an approach. The range of her artistic interventions is wide, which are done across different time periods and various subject matters to refute people’s bias by revealing the contradictory structure within the image. I’m grateful for her work, and sincerely hope that she continues her practice. 

Shin Hyeyoung

누가 바라보는가

미셸 푸코는 18세기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의 구조가 시선과 권력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높고 어두운 중앙 감시탑에서 한 명의 간수가 낮고 밝은 원형 수감시설에 있는 여러 명의 죄수를 내려다보도록 설계된 판옵티콘은 간수는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 없는 ‘시선의 불평등’에 구조의 핵심이 있다. 언제든 감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볼 수 없음에서 오는 공포가 죄수들 스스로 지배를 내재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시선의 불평등으로부터 권력이 강화되는 셈이다. 푸코는 감시를 내재화하여 스스로 규칙을 지키는 자율적 존재가 되도록 한 것이 근대적 주체에 다름 아니며, 근대 사회 전반의 국가적 통치는 바로 그러한 원리로 형성된 권력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시선에는 바라보는 주체와 바라봄을 당하는 대상이 존재하고 그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다은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 내 시선의 불평등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울어진 권력 구조를 드러내고 고착된 관계에 파열음을 내고자 노력해왔다. 전작(前作)인 모텔을 배경으로 한 두 사진연작은 작업의 방향성을 잘 드러낸다. 모텔은 우리 사회에서 단순히 중립적 의미의 숙박업소라기보다 남성 중심의 은밀한 성적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곳이다. 작가는 모텔이라는 남성의 시선이 지배적인 공간을 젊은 여성의 시선으로 새롭게 구성하고 재해석한다. 작가 자신이 피사체로 분(扮)해 서울의 여러 모텔을 옮겨 다니며 독서, 명상, 요리 등 여러 여가 행위를 수행하고 사진으로 기록한 <Enjoy : MOTEL>(2014)과 직업상 지방의 여러 모텔을 옮겨 다니며 기거하는 작가의 아버지 모습을 찍은 <M – Father and Motel>(2015)이 그것이다. 젊은 여성과 중년 남성, 서울과 지방, 여가와 숙박 등 여러 지점에서 다른 이 두 사진 연작은 무엇보다 시선의 주체와 대상의 (불)일치의 측면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 후자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 타인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한 사람의 중년 남성으로 객관화하여 바라보고자 하는 사진가적 시선이라면, 전자는 이 사회에서 흔히 소비되는 모텔 방 안의 전형적인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깨고 작가 스스로 시선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의 역할을 ‘주체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사진에서 영상으로 매체를 확장하여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주체와 대상의 고착된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 전반의 불평등한 구조에 개입하여 균열을 일으키고자 한다. 먼저 <Image Hunting>(2018)은 최근 사회 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여성 대상 몰래카메라 범죄를 소재로 한 영상작품이다. 작가는 본인이 지하철에서 겪은 몰래카메라 사건을 토대로 여성들이 무방비 상태로 이미지 포획의 위험에 노출된 상황을 연출해 촬영한 영상, 경찰에 신고 후 해당 사건이 불기소 처리되기까지의 추적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 여성의 선정적 이미지가 웹상에서 변형되어 확산되는 과정을 가정해 연출한 포토샵 편집 장면 영상, 그리고 최근 동일범죄 동일처벌을 위한 혜화역 시위 장면 영상 등을 편집해 실제와 가상을 넘나드는 30 여 분에 달하는 영상작품을 제작했다. 전체적으로 맥락과 형식이 다른 수많은 프레임의 이미지 조각들을 이음새를 그대로 드러내며 매끄럽지 않게 결합한 이 영상은 오늘날 이미지가 생산되어 소비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왜곡과 변형을 거치게 되는지를 그 자체로 몸소 보여준다. 

사실상 이미지의 왜곡과 변형은 회화를 이상으로 삼았던 사진의 탄생부터 시작되었지만, 당시 사진은 회화와 달리 기계에 의한 모방이라는 사실로 인해 현실성을 담보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디지털 기술로 이어진 사진의 기계적 속성은 현실의 왜곡을 이미지의 기본값으로 만든다. 사진가가 무엇을 재현하고 어떤 위치에서 어디까지 프레임에 담을 것인가와 같은 최소한의 ‘선택’에 의해서만 이미지에 개입하던 것에서 이제 이미지 생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순간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서부터 비롯된 이미지와 대상의 일치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현실을 은폐한다. 특히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이미지의 경우 사회의 여러 모순과 불평등한 구조를 가린다.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이미지들은 익숙함을 넘어 표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자연스럽게 고정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여성 이미지의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판적 시각을 갖기 전 이미 획일화된 미의 기준과 남성의 왜곡된 시선으로 고착된 선정성에 맞춰 소비되고 그러한 통념이 일상에까지 반영된다. 몰래카메라의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대표적인 현대의 판옵티콘 현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몰래카메라는 기본적으로 바라보는 주체가 겨누는 카메라 렌즈를 찍히는 대상이 볼 수 없다는 시선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 화장실, 탈의실 등 공적 장소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적 몰래카메라의 경우 생산된 이미지들이 일정 공정을 거쳐 무차별적으로 인터넷상에 유포되고 자본으로 치환된다. 그와 같이 생산된 여성 이미지들의 소비는 이미지와 대상을 일치시키려는 남성들의 고정관념에 의해 작동한다. 수없이 많은 변형과 편집의 단계를 거쳐 유포됨에도 불구하고 렌즈의 관음증적 시선으로 인해 현실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를 별다른 비판 없이 기본상(像)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게 형성된 고정관념은 이 사회의 비틀린 남성중심 문화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가의 다른 두 영상은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의 모순적 실상을 작가 개인의 서사를 통해 재해석한 작품들이다. 모텔 연작에서 우리 사회 내 젊은 여성에 대한 편향된 시선에 저항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초라한 중년 남성으로 대상화하였다면, 이번 전시의 두 작품 <Deserted House_제사음식>(2017)과 <Deserted House_무덤과 비석의 위상학적 지도>(2018)에서 작가는 자신의 존재적 근원이 되는 조부모의 집과 가문의 선산을 배경으로 가부장제의 모순을 보다 구체화시킨다. 가부장제는 남성만이 온전한 주체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제도다. 가부장제 안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출생과 동시에 수많은 배제와 차별을 배태함을 의미한다. 집안의 첫 아이로 태어난다 해도 장자가 될 수 없고 집안의 모든 행사에서 첫줄에 설 수 없으며, 설령 결혼 전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해도 결혼과 동시에 본래 자신의 집안에서는 배제되고 새롭게 진입한 집안의 보조자 자리에 서게 된다. 작가는 경주 이씨(慶州 李氏) 평리공(評理公)파의 혈통을 물려받은 집안의 첫 아이지만 여성이기에 잠재적 이방인으로서 다른 성을 가진 실질적 이방인인 문중의 다른 모든 여성에 감정적으로 동조한다. 일종의 중간자적 위치에서 작가는 경주 이씨 평리공파의 집성촌 중 하나인 전라북도 정읍으로 내려가 지금은 폐허가 된 조부모의 집에서 조모의 한복을 입고 스스로 실질적 이방인으로 분해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가부장제의 핵심을 비틀어 전형성을 깨뜨린다. <제사 음식>에서는 제사에 필요한 음식을 차례로 공들여 만들지만 상을 차린 후 본인이 음식을 모두 먹고 방바닥에 구토를 하는가 하면, <무덤의 위상학적 지도>에서는 쓰개치마를 쓰고 선산의 공동묘지를 방문하지만 다른 성씨를 가진 문중의 여성들의 묘지만을 들러 헌화하고 묘비의 탁본을 떠 그녀들의 공적을 새겨 넣는 새로운 기념비를 만든다.
<Image Hunting>과 달리 <Deserted House> 연작은 모든 장면이 철저하게 기획된 영화적 형식을 따른다. 작가 자신이 피사체가 된 <Enjoy : MOTEL>처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두 영상에서 작가는 자신의 조모 혹은 유교사회의 익명의 여성으로 분해 다른 삶을 연기하고 특정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작가 자신과 관련된 실제 이야기이며 배경이 되는 장소와 소품, 다른 등장인물까지도 모두 실제 그대로이다. 전체적인 서사의 흐름은 자막을 통해 제시된다. 북을 들고 집을 나가 오랜 세월 떠돌아다니다 돌아온 조부 대신 조모가 홀로 집안을 건사하였고 그런 조모가 죽자 조부는 새로운 여성을 집에 들여 함께 살다 죽었으며 그런 조부가 경주 이씨 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집안의 큰 어른(여성)보다 더 좋은 명당자리에 묻힌 사실을 작가는 자막을 통해 무덤덤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작가의 조부모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지만 유교 문화를 토대로 형성된 남성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특별한 경우로 인식되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근간이 되었던 호주제가 폐지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자녀의 성은 기본적으로 부계를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 많은 가정에서 부계의 제사만을, 그것도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해 지내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살다간 수많은 여성들을 기억하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을 위로한다.

모든 이미지는 바라보는 자의 시선을 담지한다. ‘누가 바라보는가’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표면적으로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일 경우에도 시선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 의도는 정반대가 되기도 한다. 이다은은 여성으로서 여성을 바라본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계속하여 우리 사회 젠더와 관련된 편견과 차별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진에서 출발한 작가의 매체적 접근은 언제나 시선의 주체와 대상에 관한 반성을 전제로 한다. 작가 스스로 이미지의 대상이 됨을 자처함으로써 대상과 이미지의 일치를 당연시하는 관객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식이다. 인터넷상의 포르노 이미지를 자신의 신체에 합성한 이번 전시의 사진작품이 단적인 예시가 될 것이다. 보이는 이미지 안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고자 하는 그녀의 작가적 개입은 소재와 시대를 넘나들며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그녀의 등장이 반갑고 그 열정이 쉽게 식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다. 

신혜영 |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