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미분류

재현의 무게를 의식하기

미분류 2019년 October 19일

재현의 무게를 의식하기

내가 이다은 작가의 작업을 처음 접한 것은 지난해 소네마리라는 작은 공간에서 열린 개인전<이미지 헌팅>에서였다. 2014년부터 이어온 사진과 영상 작업들은 주로 아버지, 가족, 그리고 딸로서의 자신이라는 사적인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와 전통의 배면을 조심스럽게 들추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개인전의 핵심은 전시제목과 동명의 영상작업이었는데, 지하철 몰카를 당한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성적 기호로 소비되는 여성 이미지가 어떻게 남성적·포르노적 구조에서 생산되고 유포되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이미지 헌팅>은 공포 영화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극영화적인 연출로 시작해 몰카의 피해자인 자신이 다시 몰카라는 기법으로 ‘피해자화’되는 과정을 쫓는 다큐멘터리적 촬영으로 이어지다가, 뺏긴 이미지의 순환과 변형 양상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영상이었다. 완전히 자기독백적이지도, 관찰자적이지도 않은 <이미지 헌팅>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피해자로서의 고통 서사에 침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영상의 후반부에는 혜화시위 장면을 담아내는데, 어떤 당사자성과 분노가 아니라 반쯤은 냉소적이고 반쯤은 풍자적인 태도로 이 시대 현실의 폭력적인 재현 구조를 다루고 있었다. 

이 시대 ‘여성’에 대해 발언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과 달리, 이다은의 작업에서 먼저 읽히는 것은 그런 아이러니에 가까운 그 무엇이었다. 분노를 헛웃음으로 배출해버리듯, 작가는 현실의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시위를 담아내고, 조작/변형되는 인터넷상 여성사진들의 작동방식을 비판하는 동시에 거리낌없이 자신의 이미지로 가지고 놀기도 한다. 여기에는 아무리 남성들이 나의 이미지를 착취하고 성적대상으로 소비한다고 해도, 그 이미지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견고한 주체적 태도가 엿보이기도 하고,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로서 자신이 속한 착취와 폭력의 현실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는 기록자적 강박이 읽히기도 했다. 편집의 기법이나 구성적 전개가 주목할 만한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주지 않더라도,이 영상 작업은 여성의 경험과 성폭력에 대한 비판에만 초점을 둔 근래의 ‘페미니즘 작업’들에서 가장 현재적인 시점을 파고들며 현장성과 긴급함, 파열점을 내비치는 보기 드문 작업이었다. 

지난 2016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가장 뜨겁게 터져 나온 목소리이자, 여러 문화적 관행들과 예술의 지형을 뒤흔든 사건이다. 그 물결의 한 가운데에서 또는 아직 식을 줄 모르는 여파로서 페미니즘을 표방한 문화예술행사, 전시들이 이곳 저곳에서 등장했다.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혹자는 ‘페미니즘’이라는 표제만 달면 문화예술분야 지원금을 받거나 관객몰이에 도움이 된다며 항간에 일어나는 이런 경향들을 시류에 ‘편승’한다고 냉소하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여성작가로서 여성의 재현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언제나 망설임과 위험이 뒤따르게 마련이다(물론 일말의 망설임 없는 작가들도 있겠지만.) 순진한 당사자성의 발로가 아니라면, 언제나 여성인 ‘내’가 이 사회의 구성적 존재로서, 어떤 관계, 위계,그리고 차이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험이란 실재인 동시에 구성적 허구이기도 하다”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그 경험을 재현하고 여성의 현실을 발화하는 행위에는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 그리하여 남김없이 동일시되지 않는 편린들이 남을 것이고, 예민한 작가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행하는 각오 비슷한 것을 감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재현의 책임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재현의 윤리라고도 부를 것이다. 

이번에 아이공 미디어극장에서 상영한<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지난 해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한 렉처 퍼포먼스의 편집 영상이다. 퍼포먼스<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페대기’라는 페미니즘이론연구 콜렉티브가 함께 만들었고, 그 목적은 자신들이 함께 공부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지평을 비학술적이면서도 수행적인 방식으로 대중들과 공유하고자 했다.미디어 작가, 연극배우, 퍼포머,미술작가 등으로 구성된 성격을 십분 활용하면서 연극, 음악, 영상, 몸짓, 오브제 등이 결합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제목에서 드러나듯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도래한 페미니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그 안에서 가려진 자들,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워마드를 비롯해 자신들을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들의 트랜스젠더 배제, 난민 혐오에 맞서며 페미니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의 지형을 과감히 드러낸다. 기실, 미술 현장에서는 보기 드문 직접적인 발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은 백인 엘리트 중산층 여성의 페미니즘이 배제시킨 다양한 목소리들을 아우르기 위한 이론적·실천적 운동이다. 퍼포먼스는 이러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지금 여기 한국적 상황에 대입시켜4명의 화자들, 소위 ‘부적절한 타자’들의 목소리를 불러온다. 4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된 퍼포먼스는 트렌스젠더, 장애인-성노동자, 이주민여성, 예멘 난민을 각각 다룬다. 각 스테이지를 설명하고 보완하는 강연자-도슨트가 ‘교차성 페미니즘’이나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용어를 설명해주면서 재현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독백적 대사와 몸짓, 조명과 소도구들,공간의 연출과 영상의 상영이 각 스테이지마다 교호적으로 작동한다. 

배우, 퍼포머, 도슨트들로 각각 열연한 이들은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글로리아 안살두아의 말을 다시 패러프레이즈한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다리, 소용돌이가 몰아지는 교차로….촉진자 글로리아, 매개자 글로리아, 심연 사이의 벽에 두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 ‘우리 겨레, 민주화운동에 충성해야 한다.’진보, 학생 운동권이 말합니다. ‘우리 젠더,여성에게 충성해야지.’ 페미니스트들이 말합니다. ‘국민이 우선이야’ 사람들이 내게 말합니다. 퀴어 운동,사회주의 혁명, 생태주의, 동물권 운동에도 내가 충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문학에, 예술가의 세계에서도…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마지막의 외침은 ‘부적절한 타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고 여기는 매개자로서 창작자들의 목소리다.페미니즘을 ‘공부한’ 지적이면서 지극히 자기 의식적인 예술가들의 곤란함이다. 이렇게<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매개자(연구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자신들이 서야 할 올바른 위치를 의식하면서도 그 위치의 허약함과 허구성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재현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를 완벽하게 입을 수 있다는(이해할 수 있다는, 혹은 대변할 수 있다는)확신 자체를 거부한, 예민하고도 영리한 창작자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환영받지 못하는 자>는 이질적인 사건,혹은 수행적 실험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이기보다 다소 해설적이고 교양적인 모범생의 리포트 같은 인상을 안겨 준다.하지만, 이는 운동성이 전제된 아마추어리즘이나 메시지의 과잉이 아니라,그 재현적 책임감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들의 예민함 때문 아닐까. 

이진실(미술평론)

“가자! 부티크 MT로” – 모텔, 모델, 그리고 어떤 모드

미분류 2019년 July 23일

숨이 막히도록 뜨거운 여름 날, 이 도시에서 보다 경제적으로, 땀 흘리지 않고, 쾌적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누군가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고, 시선과 소음, 규제와 간섭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들을 충족할 수 있는 공간은 오직 자기만의 방이거나 모텔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어원이 모터(Motor)와 호텔(Hotel)의 합성어로써 주로 자동차 이용자의 숙박시설이었던 모텔은 이제 성인들을 위한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의 장소”가 되고 있다. 호텔에 비해 저렴한 이용료와 인터넷, 대형TV는 기본이고 노래방 시설, 당구대,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 및 스팀사우나, 월풀욕조, 안마시설, 테마별 룸을 갖추며 ‘우리는 지금 M.T(MoTel)간다’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모텔은 변모중이다. ‘감각적인 디자인’과 ‘세련된 실내 장식’은 젊은 여성층의 다양한 취향에 따라 계속 변화중이니, 도심에서 접근이 용이하고 단시간 이용이 가능하다는 장점과 함께 놀이 시설이 부족한 성인들에게 ‘럭셔리’하고 ‘러블리’한 모텔은 매혹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 특히, 여전히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젊은 층에게 이제 모텔은 먹고, 목욕하고, 섹스하고, 잠자고, 머무는, 거기에 놀이공간까지 결합한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다. 단순히 머물다 스치는 ‘비-장소’가 아니라, 주체의 욕망을 흠뻑 담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모텔은 ‘~여인숙, ~여관, ~장, ~모텔, ~호텔, ~텔’로 변주되며 흔히 음란한 일탈의 장소로 의미화 된 문제적 공간이었다. 그곳은 공적이면서 사적이고, 밤이면서 낮이고, 윤리와 불륜을 동시에 배태한 불온한 장소이다. 일상과 비일상, 합법과 불법이 뒤섞인 ‘부티크’하게 (부)자연스러운 곳. 이러한 모텔을 이다은은 적극적으로 향유하며 신작, <enjoy:motel> 시리즈를 통해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집에서는 하기가 어려운 일들을…어떠한 목적이나 의미도 남기지 않은 채…모텔을 탐방하며……’ 소위, ‘모텔 놀이’를 통해 이다은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재현하는 일은 현대 사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 속의 젊은 여인은 배우처럼 다양한 포즈와 의상, 표정들을 하고 있다. 연극무대의 한 장면을 스틸 컷으로 옮겨 온 듯 잘 구성되고 정제된 이곳에서 주로 슬립웨어나 목욕가운을 입은 채 포즈를 취하는 이 여인은 놀이공간을 향유하는 주체이자 배우(객체)이고,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그녀는 월풀에서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하거나, 요리를 하고, 햄버거를 먹고, 노래를 하고, 당구를 치며 누군가의 시선을 줄곧 신경 쓰고 있는 듯하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인의 시선은 사진 바깥에 놓인 응시와 욕망이 꿈틀거리는 ‘어떤 시선’들과 교차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진적으로 바라보도록 배운다. 자신을 매력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보다 정확히는 사진에 잘 나온다는 판단과도 같은 것”(수잔손탁)처럼, 엿보는 이의 시선에 응답하는 포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진에서 사진 속 여인의 나르시시즘적인 시선과 관객의 시선은 서로를 거울상으로 비추며 서로의 욕망을 투사시키는 장(field)이 된다. 그녀 자신이 욕망하는 모습에 다른 응시가 겹치며 수동적, 무의식적으로 응시를 기다리는 포즈. 모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놀이는 어떠할지, 관객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촬영 된 이 사진 속으로 미끄러진다. 이다은의 <enjoy:motel>을 즐기는(보는) 방법은, ‘누군가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고, 시선과 소음, 규제와 간섭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들을 충족할 수 있는’ 차단된 공간 속에서 ‘놀고 있는’ 이 여인의 행위를 엿보는 것이다. 그녀/작가는 놀이의 목록들을 텍스트로 제시하는데, 쓸모없이 잠시 일어나고, 곧 떠나면 그만인 (작가의 언급처럼) 무용하고 소용없는 일들의 항목이다. 그러나 쓸모없는 소비적 행태로만 읽기엔 이 젊은 여성의 포즈는 참으로 유용하다. 

‘정지’를 뜻하는 포즈(pose/pause)는 사진에서 강력한 코드를 이룬다. 흔히 읽기가 쉬운 사진일수록 코드는 선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작가-여인의 욕망과 사진 찍혀지는 것이 ‘항상 동일한가?’하는 문제를 제시해볼 수 있겠다. 이 지점이 바로 이다은의 사진적 전술이 아닐지, 남성 중심적 상징공간인 모텔에서, 여성의 유희가 어떻게 파악되고 전복될 수 있는가는 이다은의 <enjoy:motel>시리즈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젊은 층 여성 사이에서 선호되는 이미지를 작가는 반복 강화하며 어쩌면 이상화된 쾌적한 여성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의 어색함을 드러내며 사진적인 스타일로서 지배적인 문화적 코드(모텔은 어둡고, 불온하고, 남성의 질서와 시선이 지배하는…)를 해체하고 있다. 모텔 안에서의 전형적 여성성과 그동안 소비 되었던 모텔 씬(scene)의 클리세를 교묘하게 뒤섞으며 엿보기의 균열을 시도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사적인 공간이면서도 사회적인 상징과 의미로 결합된 구성물인 모텔에서의 이다은의 행위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와 어떻게 유희할 수 있는지, 남성-지배적인 시선을 교란시키며 독자적인 욕구와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공간적 실천의 주체가 되어 공간을 생산해내고, 공간과 작가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행위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주체는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행위주체와 공간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다은의 신작, <enjoy:motel>은 성별화 되어 있는 공간의 사회적 관계를 다시 읽어내야 할 과제를 던진다. 공간에 내재해 있는 다층적 권력관계와 더불어 주체와 공간의 관계성, 공간의 사회문화적 맥락과 특히 여성과 공간의 관계를 따지면서 볼 때 보는 재미는 배가 된다. 특히 인테리어의 구성과 행위 주체의 포즈는 개별 주체들에 의해 재구성되는 사회적 모드(mode)를 드러내기도 하기에, 여기-공간은 물리적 장으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재각인되는 실재 장소가 된다. 이제 흔하디흔한 모텔은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곳의 모드는 달라진다. 낮 시간의 금지의 장막과 시선(gaze)을 탈주해 사적인 안락과 희열에 빠지며 이다은이 모텔을 엔조이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능동적인 젊은 여성이 모텔 객실을 다른 컨셉으로 바꾸게 하고, 다양한 공간적 실천의 가능성들을 보여주며 모텔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픽션보다 더 허구적인 일상에서 ‘나’를 즐기는 무해하고 평화로운, 이다은의 <enjoy:motel>은 일상의 경계를 해체하며 사진은 여전히 꿈이고, 환상이고, 연극이고, 또한 사실임을 보여준다.  

최연하 독립큐레이터

Image의 Voyage

미분류 2019년 July 23일

이다은 작가는 동시대에서 자신이 행하는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실천적 행위를 통해 영상, 사진 등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 《Image Hunting》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여성’이라는 주제의식을 관통하면서, 작가가 작품으로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수행의 주체가 되고,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방식을 탐구한다는 데에 일맥상통하다. 작가가 선택한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의 방법론은 영상과 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미술적 언어로 발현된다.

포착, 획득, 가공, 내보내기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객체에게 절대적이며, 객체가 받아들이는 개인적 감상이나 의미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미지는 대상을 심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지는 포착되는 과정에서 이미 주관성을 획득한다. 예를 들어 사진을 찍을 때 사진을 찍는 사람이 프레임을 선택하여 촬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미지가 물리적으로 가공되든 보는 사람에 의한 감상으로 가공되든 이미지 자체로 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다은 작가는 몰래 포착된 –작가는 이를 ‘나는 이미지를 빼앗겼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현실과 환상을 교차하며 이미지를 대상화한다.

<Image Hunting>은 작가가 경험한 몰카사건을 신고하고, 방송출연을 하면서 마주하는 불편한 인식과 묘한 강요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표현하다가,작가가 사냥꾼이 되어 이미지를 재편집 하기도 하고, 중국 공안성의 몰카 예방 캠페인을 조롱하듯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에  덧대어 팟캐스트 영상을 차용하고, 컴퓨터툴을 사용해 직접 이미지를 가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미지가 가공되는 과정을 희화화하며, 제도 안에서 너무 쉽게 배제되어 버리는 피해자의 권리를 녹취와 몰카의 형식으로 표현한다.형식적인 측면에서 작가는 포획 당한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쫓는 과정에서 채집한 이미지들을 재구성 하는 데에 미디어에 경계를 두지 않고, 다층적 레이어를 늘어놓음으로써 작가의 개인적 서사가 담긴 영상과 텍스트로 감정의 전복을 유도한다.이다은 작가는 형식적 변이와 다양한 매체 활용을 통해 자신이 적극적으로 사건 속으로 들어가 사건을 재현하고 왜곡하여 역설적‘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작품 후반부에는 최근 대학로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집회 장면이 등장한다. 이 집회는 인터넷 채널로의‘내보내기’로 해외 SNS와 동영상 채널에서도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몰래카메라가‘molka’로 표기된 바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의 불법 촬영 문제가 단순히 몰래 찍은/찍힌 영상 정도로만 설명되기엔 어려워서 일 것이다. ‘몰카’가 도처에 도사리는 일상적 위험이 되어버린 지금, 이 뒤틀리고 구질구질한 욕망이 어떻게 팽배해버렸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발트라우트 포슈는 『몸 숭배와 광기』에서 인간이 자신의 몸을 객관화, 수량화, 수치화하려는 시도에서 거울, 체중계 등이 등장했고 이를 통해 몸의 성 상품화가 가능했다고 말한다. 여기에 자본주의와 미디어의 발달이 맞물려 정형화된 미적 기준이 형성되고 여성의 몸은 상업적 대상이 되었으며, 미디어의 다각화로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상품화 되었다. 미디어에도 구조적 위계질서가 반영되어 남성은 권력과 소비의 주체가 되고, 여성의 몸은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미디어는 이 관념들을 재생하기를 거듭하였다.

<Image Hunting>속에서 작가가 포획 당한 이미지와 작가가 포획한 이미지들은 이미지 포착, 획득, 가공, 내보내기(유포, 혹은 유포실패를 희망한다.)의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미지는 현실이고, 욕망의 주체에게는 환상이다. 몰카범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든 그것이 매체를 통해 유포되든 기어코 그것은 소비되고 만다.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서 세상으로 나간 이미지를 보고 있자니 ‘내보내기’의 과정도,사라진 이미지를 쫓는 것도 아닌 그저 부유하는 이미지만 있을 뿐이라 허무함 마저 들었다. 애초에 작가는 이미지를 소유하려는 욕망도, 가공할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작가는 그저 사건의 피해자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포획자, 가공자가 되기를 시도함으로써 시선을 전복시키고 욕망을 비틀어버린다. 

여성주의의 지리학

<Deserted House>는 장소와 젠더규범의 관계성을 함의하는 작업이다. 린다 맥도웰은 목소리를 내는 방식에는 어디에서 말하는가가 중요하며,자리가 정해진 사람들은 자리의 이동이 그 자체로 사회의 규범에 저항하는 방식이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제의 권력은 장소와 밀접하다. 특정장소, 사회, 그리고 거대서사 안에서 권력과 타자가 결정되고 나름의 젠더규범이 형성되기 때문이다.할머니는 평생 경주 이씨 가문 종가라는 공간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할아버지 없이, 종가의 며느리로써 제사를 지내고, 자식을 키운다. 그 집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에 대한 균열이 시작된 최초의 곳이기도 하다. 경주 이씨 가문의 타자이자 이방인인 할머니는 며느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그 역할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배우자에게, 배우자의 딸에게로 전이된다. 작가는 마치 복원하듯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제사음식을 하는 과정을 재현하고, 재현의 결과물을 먹은 뒤 토해낸다. 구토하는 행위의 메타포는 매우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토하는 행위 자체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사유하는 태도 같기도 하고, 토사물을 가부장제 안에서 억눌려버린 여성의 울분 같기도 하다. 어쩌면 행위 자체가 ‘저항’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현대 여성주의 이론에서 만들어낸 개념 가운데 가부장제야말로 가장 남용되고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이론화되지 않은 개념이라는 낸시 홈스트롬의 말처럼, <Deserted House>와 <무덤과 비석의 위상학적 지도>다가갈 때에도 가부장제를 결부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때 자꾸 시선의 균열이 생겨난다. 가부장제를 남성지배의 형식이나 사례에 사용하느냐 혹은 사회주의적 측면에서 자본주의 내 계급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접근 방식은 상이해지며, 이때 시각의 균열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가부장제는 세분화된 젠더 이슈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Deserted House>를 통해서 우리는 가정, 집이라는 장소가 갖는 억압성, 통제성, 그 속에 모성화 된 여성의 전형에 대해 좀 더 세분화된 시각으로 가부장제도 속 여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몇 년 전, 명절 스트레스에 관한 설문 조사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세대별, 연령별, 성별마다 이유는 다양했다. 기혼여성들의 경우 제사음식을 차려야 하는 노동에 대한 스트레스가 물론1위를 차지했다. 기혼 남성들의 경우 할 일이 없어서,그 때문에 장인어른과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해서, 본가이든 처가이든 명절 후 부부싸움을 해서 등이 이유였다. 요즘이야 많이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직장과 일,관습 속 젠더 역할 분리가 여전히 선명한 것은 사실이다. 현상학적 측면에서,자연스럽게 체득된 생활의 내외면적 현상들을 통해 작가의 작업을 바라본다면, 작가가 젠더 의식을 작업으로 불러들이는 방식은 가변적이고 수행적이다. 다층적 매체를 활용하여 변이하는 이미지들은 가변적이며, 자신이 작품의 한 가운데로 적극 개입하는 면에서 수행적이다. 또한 현상학에서 다수가 모인 시공간은 객관적 세계로 받아들여 진다. 다수가 모인 곳은 공간성을 띠고,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에는 관념, 규범, 규칙들과 같은 레짐(regime)이 생겨나므로 이 지점에서 지리학적으로 여성주의에 접근하는 앞선 이론과 상응하는 부분이 있다.

개인의 서사는 결코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예술 행위 또한 사회구조적 서사와 개인의 서사, 이 양가가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이는 이다은 작가가 자신의 고민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예술을 택했다는 데서 맥락을 함께 한다. 또한 단순히 성, Sex로 설명되지 않는 구조적 성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젠더라는 용어가 생겨났고,개인은 일정한 장소 마다 역할을 획득하며/당하며, 개인의 생애에서 발생하는 서사는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실하게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멀리보기를 실행해야 하며, 이때 발생하는 시선들이 예술을 통해 작업으로 실현되기도 한다.그러나 여전히 가족이 중심 단위인 사회에 살고 있고, 호주제는 폐지되었지만 뿌리깊은家의식은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가정은 개인과 제도 사이의 교집합이다. 중첩된 이 사회적 단위 안에서 파생되는 계급,권력, 성별 역할 고착화 등의 문제들을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이제서야 고분(孤憤)한다.

무덤과 비석의 ‘지정학적’ 지도 

<무덤과 비석의 위상학적 지도>는 젠더와 관습, 그리고 위계에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부장제도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타자였다. 타자이나 필요한, 필요하지만 주체가 될 수 없는 타자로, 이는 한편으로<Deserted House>에서 할머니가 제사를 지내시던 모습을 상상으로 연상케 한다. 그러나 종가의 위계 앞에서는 그들의 어머니, 종가의 이방인인 큰 할머니는 위계의 상징이 된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자리에 먼저 돌아가신 큰 어머니가 묻히지 못하고 늦게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가 묻혀서 자식들은 억울하다.묘자리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아서 이장을 주장하는 것일까, 돌아가신 어머니의 위상을 회복 시켜드리지 위함일까. 이 욕망을 엿본 작가는 종가의 비석에 여자인 자신의 이름을 올려준다는 아버지에 말에 자신의 욕망에 대해 고민한다. 종가의 비석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것인가 또는 이름을 지움으로써 부조리한 가문의 관습으로부터 스스로 해방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양가 감정에 직면한 것이다. 이로부터<무덤과 비석의 위상학적 지도>는 시작된다. 

가문의 비석을 수정하고 이를 탁본하는 행위는 유교사회의 규율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며, 이씨 가문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사실 어느 일가의 공적비는 가문의 명망이나 이름을 위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지곤 한다. 여기서도 위계가 존재하는 것이다.영상 속 이씨 가문 후손(작가)은 공적비의 이름의 음각을 점토로 완전히 뒤덮지 않고 적당히 매운 뒤 탁본한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이름들은 탁본에 흐릿하게 남아 선명한 활자와 대조된다. 마치 잔재처럼 말이다.

젠더, 가정, 국가, 사회, 직장, 혈연 등 객체로써 개인을 정체화할 수 있는 여러 요소에 대해 작가는 부정하거나 결론 짓거나 선포하지 않는다. 그저 적극적 수행자가 되어 고민을 계속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전의 예술이 사회문제를 표상하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동시대의 예술은 사회문제를 실천적 기재로 변환하는 행동주의적 특질을 띤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다은 작가의 작업 또한 이 흐름을 같이 한다. ‘매체는 예술가 개인의 기억을 복구하여 드러내는 일종의 역사성을 지닌다’는 로잘린드 크라우드의 말처럼,작가의 사적 경험에서 출발한 세 작품은 작가의 기억과 당시 체득한 감정을 복구하고, 작품은 작가 개인의 역사를 상징하는 매개체가 된다. 

며칠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의 운전이 합법화되었다.사우디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운전’이 금지되었던 나라이다. 며칠 새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여성운전’이라는 단어에서 스며 나오는 이 묘한 불편함을 어찌해야 할까. 그 와중에 거대 자동차 회사들은 앞다투어 여성을 타깃으로 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그렇기에 이다은 작가의 작업을 보며 필자는 필연적인 연대의식을 느꼈다. 여성, 아버지의 가부장적 의식, 제사, 제사음식을 할 때 눈치를 보며 아버지와 방에서 쉬던 남동생, 결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필자의 개인적 서사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작업들이 거듭하는 수행과 전복의 변증법을 통해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깊이 들여다보기, 함께 들여다보기이다. 작가는 외부와 제도로부터 자신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 하에 끊임없이 미술 장치의 활용, 형식적 전회를 통해 자신의 사적 영역에서의 작가로의 정체성에 대한 담론, 그리고 여성주의 담론을 정립하고 다져가는 중인 듯 하다. 자기세계 안에서 ‘자신의 말들의 말을 포괄하는 담론’을 확고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 인가. 더군다나 요즘처럼 젠더 갈등이 심화되고 페미니즘 이론 서브컬쳐의 영역까지 고르게 진입한 한국 사회의 지금에서 말이다.

글. 김가영 (아이공 큐레이터)

Whose Gaze 누가 바라보는가

미분류 2019년 July 23일

Whose Gaze

            Michel Foucault claimed that the structure of panopticon, designed by Jeremy Benthan in the eighteenth century, revealed the relationship between power and gaze. The core of panopticon, whosecircular structure was designed to enable the warden to have 360 degree visibility on every prisoner, lies in the inequality of this gaze, where the warden could see the prisoners and the prisoners can’t. The fear of being surveilled 24/7 and the lack of visibility led prisoners to internalize the logic of subjugation. The modern subject, according to Foucault, was someone who internalized the logic of surveillance and became an autonomous being who abides by the rules on their own, which served as a founding element of governmentality in the modern society. This critique still holds to this date, as all forms of gaze presuppose the seer and the seen, creating an unequal power relationship. 

            Through her personal experience, Lee Da Eun has been trying to expose the uneven power structure created from the inequality of gaze, and to rupture this relationship. Her previous series of photography work, which deals with motels, exemplify this approach. In the context of South Korean society, motels are not neutral space for accommodation but a symbolic place for discreet sex in male-centered imagination. The artist reconstructs and reinterprets this space dominated by the male gaze from the femaleperspective. In Enjoy: MOTEL (2014), the artist herself takes on the role of photographic subject, conducting various activities ranging from reading and meditation to cooking at many different motels in Seoul. On the other hand, the photographic subject in M—Father and Motel (2015) is the artist’s father, whostayed at motels on his business trips to other provinces. Aside from the set of contrasts between young woman and middle-aged man, Seoul and other provinces, recreational activities and lodging, etc., the most noticeable difference between the two works lies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bserver and the observed. In the latter work the artist creates a critical distance from her own father and portrays him as a middle-aged man. Meanwhile, in the former the artist, being the viewer of her own gaze, performs an “autonomous” role of the photographic subject as shedeviates from the widely-consumed, stereotypical image of young woman in a motel room.

            In this exhibition, Lee’s medium extends from photography to video in her attempt to critically examine the fixed subject-object relation in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image, intervene in the unequal social structure and create ruptures. Image Hunting (2018) takes on the issue of spycam crimes against young women, which has become subject to the most heated public debate in South Korea in the recent years. Based on the personal experience of having been a spycam victim in the subway, Lee created a thirty-minute-long video that combines various footages that traverses the real and virtual, ranging from the staged scenes in which a female character becomes exposed to the danger of image poaching; documentary footage of the artist’s attempt to investigate her own case until the police dropped it; captured footage of photoshop process in which images of woman become modified and dispersed throughout web; and the footage taken from the anti-spycam protest near Hyehwa station. Overall, all these footages have different contexts and forms, and Lee’s editing is far from seamless. This resulted in the video work that exemplifies how much transformation and distortion the image undergoes from its production to consumption. 

            Althoughthe distortion and transformation of images started with the birth of photography that took painting as its ideal, the photography, the imitation by the machine, guaranteed reality, unlike painting. Today, however, the mechanical properties of photography led by digital technology take the distortions of reality as the default for images. Whereas the old photographer has intervened in the image only in terms ofminimal “choice”—such as what to represent and how to frame it—the image producer intervenes from beginning to end. Nevertheless, the belief in the correspondence between photographic images and what they represent still conceals reality. In particular, images that are widely circulated in public conceal the contradictory and unequal structure of society. Images that are frequently exposed to the media are taken to be normative, beyond being merelyfamiliar, and naturally form stereotypes. Before people could develop a critical eye, the imagesof woman are already being consumed according to the standard of beauty that has been made uniform and the distorted gaze of the male, and the resulting conventions are reflected in everyday life. The situation is even worse for the spycam issue. The spycam, which is often referred to as an exemplary panoptic phenomenonof the contemporary world, presupposes inequality of visibility, where the photographed (or filmed) can’t see the photographer (or the film taker). Furthermore, the images produced by illegal spycams targeting women in public places such as subways, toilets, and dressing rooms, are distributed on the Internet indiscriminately through a certain process and become transferred to capital. The consumption of such images of women is driven by men’s belief in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se images and their objects. Despite the images being subject to through numerous transformations and editing processes before their distribution, they are mistaken for a reality due to the voyeuristic gaze of the lens. As a result, many people accept the distorted image of woman without much criticism, and the resulting stereotypes further consolidate the twisted male-centered culture of this society.

            The other two video works in this exhibition are the artist’s re-interpretation of the paradox of patriarchal South Korean society through her personal narrative. Whereas Lee resists the prejudice against young women and objectifies her own father as a plain middle-aged man, she makes concrete the paradox of patriarchy,which takes place at her grandparents’ house and clan gravesite in Deserted House_Ceremonial Foods(2017) and Deserted House_The Topological Map of the Gravesand Gravestones (2018). Patriarchy implicitly recognizes man as the only wholesome subject. Being born as a woman within this structure implies various forms of exclusion and discrimination: being the firstborn girl isn’t entitled to what the firstborn boy would be, excluded from the family events, and excluded from the clan once married, which would assign her to the role of caretaker and supporter for the new family. Despite being the firstborn in the family descended from Pyongrigong, a division of the Gyeongju Lee clan, the artist sentimentally identifies with other women in the family, who have different surnames that mark them as potential outsiders to the family. In somewhat mediator-like position, Lee visits Jeongeuop, North Jeolla Province, one of the cities where the members of Pyongrigong division gathers for holidays. To twist the core logic of patriarchy and break down stereotypes, she plays the role of an outsider, wearing her grandmother’s hanbok at her grandparents’ house, which has become a run-down hut. In Ceremonial Foods, she carefully prepares food for jesa, eats them, and then throws up on the floor. InTopological Map of the Graves, Lee visits her ancestors’ gravesite in veil, offering flowers only to the female members of her clan and making their gravestone rubbings, which then she uses to create a new memorial filled with their achievements.

            UnlikeImage Hunting, the Deserted House series adopts a form similar to that of narrative film. Just like Enjoy: MOTEL, the artist herself is the filmic subject in these, where she acts out the roles of her own grandmother and an anonymous woman in the Confucian society. However, they are not completely fictional, as they are, along with the various props and the locations in the videos, based on the artist’s actual life. The overall narrative is provided in the subtitle, which tells the story of how her grandfather left home to play his drum across the country, leaving the artist’s grandmother to take care of the household. After she died, he came back home with another woman, and was buried under a better grave than that of the elder of the family—who was a woman—simply by virtue of carrying the surname of Gyeongju Lee clan. All this is narrated in a matter-of-fact tone. In fact, this very personal narrative about the artist’s own grandparents never strikes us as peculiar in the patriarchal society founded on Confucian culture. Although the patriarchal family register system known as hojuje haslong been abolished, this society still maintains patrilineality, exploiting women’s labor to commemorate only male ancestors at jesa. The artist memorializes these numerous, nameless women, and comforts other numerous women who still live in a similar way.

            Every image carries the gaze of viewer. The question, “whose gaze?” is more important than one usually thinks. Two superficially same images may carry opposite intentions depending on who the viewer is. Lee Da Eun gazes at woman as woman. She recognizes her own identity and problematizes the gender bias and discrimination in the South Korean society. Her approach to media is always based on reflections on the subject and object of gaze. The artist herself sometimes volunteers to be the image object, refuting people’s common belief in the strict correspondence between the representation and the represented. Editing herself into the pornographic image acquired from the web is a great example of such an approach. The range of her artistic interventions is wide, which are done across different time periods and various subject matters to refute people’s bias by revealing the contradictory structure within the image. I’m grateful for her work, and sincerely hope that she continues her practice. 

Shin Hyeyoung

누가 바라보는가

미셸 푸코는 18세기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의 구조가 시선과 권력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높고 어두운 중앙 감시탑에서 한 명의 간수가 낮고 밝은 원형 수감시설에 있는 여러 명의 죄수를 내려다보도록 설계된 판옵티콘은 간수는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 없는 ‘시선의 불평등’에 구조의 핵심이 있다. 언제든 감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볼 수 없음에서 오는 공포가 죄수들 스스로 지배를 내재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시선의 불평등으로부터 권력이 강화되는 셈이다. 푸코는 감시를 내재화하여 스스로 규칙을 지키는 자율적 존재가 되도록 한 것이 근대적 주체에 다름 아니며, 근대 사회 전반의 국가적 통치는 바로 그러한 원리로 형성된 권력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시선에는 바라보는 주체와 바라봄을 당하는 대상이 존재하고 그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다은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 내 시선의 불평등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울어진 권력 구조를 드러내고 고착된 관계에 파열음을 내고자 노력해왔다. 전작(前作)인 모텔을 배경으로 한 두 사진연작은 작업의 방향성을 잘 드러낸다. 모텔은 우리 사회에서 단순히 중립적 의미의 숙박업소라기보다 남성 중심의 은밀한 성적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곳이다. 작가는 모텔이라는 남성의 시선이 지배적인 공간을 젊은 여성의 시선으로 새롭게 구성하고 재해석한다. 작가 자신이 피사체로 분(扮)해 서울의 여러 모텔을 옮겨 다니며 독서, 명상, 요리 등 여러 여가 행위를 수행하고 사진으로 기록한 <Enjoy : MOTEL>(2014)과 직업상 지방의 여러 모텔을 옮겨 다니며 기거하는 작가의 아버지 모습을 찍은 <M – Father and Motel>(2015)이 그것이다. 젊은 여성과 중년 남성, 서울과 지방, 여가와 숙박 등 여러 지점에서 다른 이 두 사진 연작은 무엇보다 시선의 주체와 대상의 (불)일치의 측면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 후자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 타인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한 사람의 중년 남성으로 객관화하여 바라보고자 하는 사진가적 시선이라면, 전자는 이 사회에서 흔히 소비되는 모텔 방 안의 전형적인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깨고 작가 스스로 시선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의 역할을 ‘주체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사진에서 영상으로 매체를 확장하여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주체와 대상의 고착된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 전반의 불평등한 구조에 개입하여 균열을 일으키고자 한다. 먼저 <Image Hunting>(2018)은 최근 사회 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여성 대상 몰래카메라 범죄를 소재로 한 영상작품이다. 작가는 본인이 지하철에서 겪은 몰래카메라 사건을 토대로 여성들이 무방비 상태로 이미지 포획의 위험에 노출된 상황을 연출해 촬영한 영상, 경찰에 신고 후 해당 사건이 불기소 처리되기까지의 추적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 여성의 선정적 이미지가 웹상에서 변형되어 확산되는 과정을 가정해 연출한 포토샵 편집 장면 영상, 그리고 최근 동일범죄 동일처벌을 위한 혜화역 시위 장면 영상 등을 편집해 실제와 가상을 넘나드는 30 여 분에 달하는 영상작품을 제작했다. 전체적으로 맥락과 형식이 다른 수많은 프레임의 이미지 조각들을 이음새를 그대로 드러내며 매끄럽지 않게 결합한 이 영상은 오늘날 이미지가 생산되어 소비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왜곡과 변형을 거치게 되는지를 그 자체로 몸소 보여준다. 

사실상 이미지의 왜곡과 변형은 회화를 이상으로 삼았던 사진의 탄생부터 시작되었지만, 당시 사진은 회화와 달리 기계에 의한 모방이라는 사실로 인해 현실성을 담보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디지털 기술로 이어진 사진의 기계적 속성은 현실의 왜곡을 이미지의 기본값으로 만든다. 사진가가 무엇을 재현하고 어떤 위치에서 어디까지 프레임에 담을 것인가와 같은 최소한의 ‘선택’에 의해서만 이미지에 개입하던 것에서 이제 이미지 생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순간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서부터 비롯된 이미지와 대상의 일치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현실을 은폐한다. 특히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이미지의 경우 사회의 여러 모순과 불평등한 구조를 가린다.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이미지들은 익숙함을 넘어 표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자연스럽게 고정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여성 이미지의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판적 시각을 갖기 전 이미 획일화된 미의 기준과 남성의 왜곡된 시선으로 고착된 선정성에 맞춰 소비되고 그러한 통념이 일상에까지 반영된다. 몰래카메라의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대표적인 현대의 판옵티콘 현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몰래카메라는 기본적으로 바라보는 주체가 겨누는 카메라 렌즈를 찍히는 대상이 볼 수 없다는 시선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 화장실, 탈의실 등 공적 장소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적 몰래카메라의 경우 생산된 이미지들이 일정 공정을 거쳐 무차별적으로 인터넷상에 유포되고 자본으로 치환된다. 그와 같이 생산된 여성 이미지들의 소비는 이미지와 대상을 일치시키려는 남성들의 고정관념에 의해 작동한다. 수없이 많은 변형과 편집의 단계를 거쳐 유포됨에도 불구하고 렌즈의 관음증적 시선으로 인해 현실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를 별다른 비판 없이 기본상(像)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게 형성된 고정관념은 이 사회의 비틀린 남성중심 문화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가의 다른 두 영상은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의 모순적 실상을 작가 개인의 서사를 통해 재해석한 작품들이다. 모텔 연작에서 우리 사회 내 젊은 여성에 대한 편향된 시선에 저항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초라한 중년 남성으로 대상화하였다면, 이번 전시의 두 작품 <Deserted House_제사음식>(2017)과 <Deserted House_무덤과 비석의 위상학적 지도>(2018)에서 작가는 자신의 존재적 근원이 되는 조부모의 집과 가문의 선산을 배경으로 가부장제의 모순을 보다 구체화시킨다. 가부장제는 남성만이 온전한 주체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제도다. 가부장제 안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출생과 동시에 수많은 배제와 차별을 배태함을 의미한다. 집안의 첫 아이로 태어난다 해도 장자가 될 수 없고 집안의 모든 행사에서 첫줄에 설 수 없으며, 설령 결혼 전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해도 결혼과 동시에 본래 자신의 집안에서는 배제되고 새롭게 진입한 집안의 보조자 자리에 서게 된다. 작가는 경주 이씨(慶州 李氏) 평리공(評理公)파의 혈통을 물려받은 집안의 첫 아이지만 여성이기에 잠재적 이방인으로서 다른 성을 가진 실질적 이방인인 문중의 다른 모든 여성에 감정적으로 동조한다. 일종의 중간자적 위치에서 작가는 경주 이씨 평리공파의 집성촌 중 하나인 전라북도 정읍으로 내려가 지금은 폐허가 된 조부모의 집에서 조모의 한복을 입고 스스로 실질적 이방인으로 분해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가부장제의 핵심을 비틀어 전형성을 깨뜨린다. <제사 음식>에서는 제사에 필요한 음식을 차례로 공들여 만들지만 상을 차린 후 본인이 음식을 모두 먹고 방바닥에 구토를 하는가 하면, <무덤의 위상학적 지도>에서는 쓰개치마를 쓰고 선산의 공동묘지를 방문하지만 다른 성씨를 가진 문중의 여성들의 묘지만을 들러 헌화하고 묘비의 탁본을 떠 그녀들의 공적을 새겨 넣는 새로운 기념비를 만든다.
<Image Hunting>과 달리 <Deserted House> 연작은 모든 장면이 철저하게 기획된 영화적 형식을 따른다. 작가 자신이 피사체가 된 <Enjoy : MOTEL>처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두 영상에서 작가는 자신의 조모 혹은 유교사회의 익명의 여성으로 분해 다른 삶을 연기하고 특정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작가 자신과 관련된 실제 이야기이며 배경이 되는 장소와 소품, 다른 등장인물까지도 모두 실제 그대로이다. 전체적인 서사의 흐름은 자막을 통해 제시된다. 북을 들고 집을 나가 오랜 세월 떠돌아다니다 돌아온 조부 대신 조모가 홀로 집안을 건사하였고 그런 조모가 죽자 조부는 새로운 여성을 집에 들여 함께 살다 죽었으며 그런 조부가 경주 이씨 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집안의 큰 어른(여성)보다 더 좋은 명당자리에 묻힌 사실을 작가는 자막을 통해 무덤덤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작가의 조부모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지만 유교 문화를 토대로 형성된 남성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특별한 경우로 인식되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근간이 되었던 호주제가 폐지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자녀의 성은 기본적으로 부계를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 많은 가정에서 부계의 제사만을, 그것도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해 지내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살다간 수많은 여성들을 기억하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을 위로한다.

모든 이미지는 바라보는 자의 시선을 담지한다. ‘누가 바라보는가’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표면적으로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일 경우에도 시선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 의도는 정반대가 되기도 한다. 이다은은 여성으로서 여성을 바라본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계속하여 우리 사회 젠더와 관련된 편견과 차별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진에서 출발한 작가의 매체적 접근은 언제나 시선의 주체와 대상에 관한 반성을 전제로 한다. 작가 스스로 이미지의 대상이 됨을 자처함으로써 대상과 이미지의 일치를 당연시하는 관객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식이다. 인터넷상의 포르노 이미지를 자신의 신체에 합성한 이번 전시의 사진작품이 단적인 예시가 될 것이다. 보이는 이미지 안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고자 하는 그녀의 작가적 개입은 소재와 시대를 넘나들며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그녀의 등장이 반갑고 그 열정이 쉽게 식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다. 

신혜영 |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