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를 표류하는 자들의 섬광을 쫓는 법
극도의 추상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라는 현실 세계를 재현해 내는 문제는 동시대 미술에서 꽤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난제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한한 팽창은 육/해/공의 물리적 시공간은 물론, 인식 불가능한 코드들로 이루어진 디지털 기술이 직조해 낸 비물질적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국경 없는” 세계화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과연 그런가? 이동의 제한이 최소화되고 유동성이 극대화되었다고 알려진 이 시대는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종 경계선으로 철저하게 구획된 세계로 남아 그들을 불법 이주로 내몬다. 이주는 국제적 난민뿐만 아니라 도시 재개발 등 우리 삶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와 속에서 만들어진 근대 과학 기술 및 미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측량술과 지도제작술이 그어 놓은 이 추상적인 경계선들은 오늘날 현실 세계에서 더욱 공고하게 자리 잡아 그 힘을 발하고 있다.
이다은은 주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힘들의 지배 아래, 트렌스젠더 여성, 난민, 장애인 성매매자 등 성 소수자라 분류되는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이를 통해 보편 사회의 바깥으로 축출하는 상부 사회 구조를 읽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보다 특이할 점은 작가가 이 주제를 “미적 형식”으로 재구성해내는 방식인 듯 보인다. 때문에 이다은의 작품 전반이 주는 첫 인상은 오히려 다양한 기술과 매체를 활용해 생산한 다소 과잉되고 또 조악한 이미지들로 집중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미지가 어떻게 어떤 사건을 재구성해는가”, “또 이미지가 우리의 인식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보다 구체적으로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재난 사태를 과연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여기서 재현은 어떤 의미를 발할 수 있는가”라는 예술가의 고민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다은의 작업은 단순히 작품이 조명하는 내용의 측면을 소재로 다루는 것을 넘어, 동시대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가 생산, 소비, 유포되는 방식 자체를 전유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이미지의 재현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천착하는 듯 보인다. 다시 말해, 순간으로 점멸하며 스크롤링 되는 이미지로 치환된 현실 세계, 실제적인 필드워크, 다양한 방식의 리서치를 통해 수집된 자료들, 그리고 새로운 기술과 매체, 형식을 지향하는 이미지 생산 방식을 총체적으로 접목하여 이다은이 가공해 낸 새로운 세계 이미지는 서로를 응시하고 또 서로를 반사시키며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간극 속에서 우리가 현실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감각하도록 유인하는 데 보다 본질적인 관심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덱스, 성좌〉(2021)와 〈은유의 변주들〉(2022) 두 작품을 중심으로 이다은이 난민 재현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오가며 이를 재현하려 분투 속에 잠재된 예술적 함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단채널 영상 작품 〈인덱스, 성좌〉는 실시간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동시대 이미지의 특징들의 미적 방법론으로 치환하는 작가 특유의 작업 방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작품은 어느 날 인터넷 기사를 통해 우연히 발견한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되어 고문당한 ‘M’이라는 실존 인물이 포착된 CCTV 이미지에서 시작된다. 현재의 화성외국인보호소, 그리고 1975년 부산 영도에 개소된 베트남난민보호소가 있었던 장소(현재는 운영되지 않는다.)에 대한 리서치 자료들이 오가는 과정은 난민과 그들의 이주라는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난민이라는 대상을 이미지를 통해 서사화하는 방식은 구술, 인터뷰, 녹취, 기록자료 등 개인적 차원에서의 경험이나 미시적 역사 혹은 거시적 역사를 교차시키며 현실 세계를 사실적으로 기술하려는 전통적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접근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된다.
영상 속에서 재구성되는 이 역사적 장소는 사실상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고 산산이 조각나고 부유하고 표류하는 기이한 공간으로 나타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간은 (군사 기술의 핵심이기도 한) 초정밀 라이다(Laida) 기술을 활용해 촬영한 장면들을 3차원 스캐닝 기법을 활용해 완성된 것이다. 라이다는 수십만 개의 빛을 사방으로 쏘고 이 빛이 사물에 부딪혀 반사되는 시간을 측정해 입체적으로 공간을 옮겨내는 장비이다. 라이다 기술이 생산한 반사된 이미지 데이터는 다시 한 번 포인트 클라우드 변환 과정을 거쳐, 실재하는 장소를 표식하는 화면 위에 가득 찬 하얀 점들이 된다. 이 장면은 실제 장소라기보다는 마치 별자리들로 수놓인 미지의 밤하늘을 표류하는 기분을 자아낸다. 분명, 필드워크와 아카이빙이 근간이 되는 리서치 기반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라이다 기술이 송출하는 이미지 더미들을 가공하여 재현되는 ‘M이라는 인물’, ‘화성외국인보호소’, ‘베트남난민보호소’는 서로의 연결고리, 관계, 접점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분산된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작품이 난민과 이주를 둘러싼 하나의 매끄럽고 완결된 서사를 구축하지 못했다 혹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공간 스캐닝 기술의 정교함은 실제 공간의 좌표와 연결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을 산출하며 자기 한계를 드러낸다.
이다은은 작품을 통해 난민 재현의 어려움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여기에는 중요한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별자리 같은 것으로 상징화된 난민과 이주의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도달하려는 지점은 어디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다은이 어떤 이유에서든 이동할 수밖에 없는 자들 혹은 어떤 이유로 인해 이동할 수 없는 자들의 문제를 예술 언어를 매개로 다루고자 할 때에는 미술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문제인 예술과 삶 사이의 간극,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과 이를 넘어서기 위한 나름의 예술 실천 태도가 기입되어 있다. “이미지를 통해 생산된 현실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힘을 발할 수 있는가.” 이미지는 결코 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은 양가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덱스, 성좌〉는 동시대 기술 매체가 양산하는 다양한 이미지 제작 방법으로 난민이라는 구태의연한 소재를 새롭게 보이도록 하는 동어 반복적인 미적 형식으로 귀결되도록 하거나 혹은 동시대 이미지 작동 방식에 대한 비판적 읽기로부터 우리 사회가 난민을 대상화하고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로 보이게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맞닿을 수 없는 양날이 현실을 현실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즉 이미지의 정치적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이후 작가는 〈은유의 변주들〉에서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일어난 사건 기록을 토대로 몇몇 장면들을 퍼포먼스로 옮겨내며 은유가 재현하는 변주의 세계가 곧 현실 세계를 마주하게 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전작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를 몸으로 번역하는 퍼포머들의 몸짓과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은유하는 세계는 여전히 그 최종 목적지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다은에게 은유는 한편으로는 (그것이 예술가의 윤리적 책무이든, 연민이든 연대를 위한 목소리이든) 난민이라는 타자를 위한 정치적 이미지 생산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퍼포머들이 입고 있는 반짝이는 코스튬과 인조가죽 소품이 만들어내는 과잉의 시각적 효과가 암시하듯, M이 당한 ‘새우꺾기’ 고초를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대상처럼 보이게도 한다. 〈은유의 변주들〉에서 이다은은 재현에서 문제가 되는 힘의 역학 관계를 인식하고, 가공된 이미지에 얽힌 은유와 변주의 가능성을 찾아보려 한다.
영상에서 특이할 점은 화성외국인보호소 로비를 스캔한 장면 속 거울이 비추는 아이패드를 들고 있는 이 사건을 추적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작품 속에서 난민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노출하지만, 아카이빙 기록으로 재생되는 장면들이 정확히 이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화성의 ‘M’, 부산의 ‘베트남 난민들’이 어떻게 공명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다은이 생산한 이미지는 다층적 사유와 개입의 난반사를 일으킨다하더라도, 작가 자신이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이들 작품이 무엇을 위한 분투인지가 흐려지고 만다. 이것은 오늘날 현실 정치와 개입이 유약해진 우리 사회의 단면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러한 사회 위에서 움직이는 사회적, 정치적 미술의 현재적 위상을 드러낸다. 예술이 실제적인 사회 변혁을 이뤄낼 수는 없다는 점에서 예술의 무능함이 논해지는 오늘날, 예술은 결코 현실 사태와 합치될 수 없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발 물러난다.
하지만 예술이 생산하는 미적 생산물들이 현재의 삶의 양식을 결정짓는 사회 시스템을 가리키는 한, 그들은 전자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거리두기를 통해 현실을 스크롤하는 동시에 스크롤되는 세계에 잠시 제동을 거는 자들이다. 이다은이 쫓는 온갖 은유들이 지칭하는 대상에는 점점 더 정치적 무기력이 일상화되는 우리 시대의 민낯들이 이미 일렁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다은의 작품들은 동시대에 정치적인 예술을 한다는 것의 모순, 역설, 그리고 재현 (불)가능성의 충돌 속에서 유효한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시도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작품을 통해 그려내려는 지도로 압축된 추상으로서의 현실 세계가 작동하는 공식 아래 은폐된 채 유동하는 힘들을 재현해내는 것, 곧 난민이라는 대상으로 상징화되는 이미지가 계속하여 생산될 수 있도록 하는 세계의 본질적 구조를 보다 첨예하게 드러내기 위한 예술적 탐색과 태도가 필요하다. 이때 M이라는 개인-화성외국인보호소-베트남난민수용소가 중첩되며 만들어진 이미지의 세계가 현실 세계의 표피를 걷어내며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방통행로”로이자 찰나의 “성좌”로 빛날 수 있을 것이다.
김태인/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